‘유찰, 유찰, 또 유찰….’
최근 국내 함정 건조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이 걸린 방위산업에서 기업들이 입찰을 포기하며 백기를 들고 있다. 한국형차기구축함(KDDX) 배치-Ⅱ 개념설계 사업은 HD현대중공업 불참으로 유찰된 끝에 한화오션이 단독입찰로 수의계약을 따냈다. 반대로 해양정보함(AGX)-Ⅲ 기본설계는 한화오션이 불참하면서 HD현대중공업이 가져갔다.
치열한 기술 경쟁을 통해 사업자를 가려내야 할 방위산업이 어쩌다 포기가 속출하는 판으로 전락했을까. 업계는 방위사업청의 오락가락 입찰 지침이 되레 현장에서 경쟁을 몰아냈다고 지적한다.
함정 건조는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를 거쳐 선도함 건조 순으로 이뤄진다. 2006년 방사청 개청 이후 업계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기본설계를 수행한 업체가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까지 맡는다’는 암묵적 원칙을 지켜왔다. 함정 뼈대를 설계한 곳이 배를 제작해야 결함을 최소화하고, 문제 발생 시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있어서다.
이런 원칙은 뼈아픈 교훈에서 비롯됐다. 1990년대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사업 당시 기본설계는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맡았다. 시운전 과정에서 수중 방사 소음 문제가 발생하자 양측이 책임 소재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룰이 흔들린 것은 2020년 KDDX 사업부터다. 방사청은 상세설계를 경쟁입찰에 붙였다. 방사청의 선택도 이해는 간다. 이 사업 개념설계는 한화오션이, 기본설계는 HD현대중공업이 수행했다. 기밀 유출 논란 등으로 양사 간 골도 깊어진 상태였다.
기업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자금과 인력을 들여 기본설계를 완수해도 상세설계에서 탈락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경쟁사에 핵심 기술과 도면만 헌납하는 꼴이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에서는 개념설계와 기본설계 단계에서 힘을 덜 들이거나 아예 입찰에 불참하는 게 ‘전략적 묘수’라는 얘기도 나온다.
더 큰 문제는 미래다. 정부는 지난 26일 ‘대한민국 핵추진잠수함 개발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2030년대 중반까지 선도함을 진수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초기 설계 단계부터 기업들이 적당히 흉내만 내는 식으로 임한다면 최종 결과물인 함정의 완성도는 불 보듯 뻔하다.
우리 기업끼리 모호한 규정을 두고 집안싸움을 벌이는 사이 일본은 철저한 원팀을 꾸려 수주전에 나서고 있다. 방산업계의 연구개발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도 공정한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사청의 일관성 있는 입찰 지침 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1 day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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