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데이터로 쌓은 현대판 '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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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데이터로 쌓은 현대판 '밭담'

제주의 밭엔 바람이 먼저 들른다. 눈길 닿는 곳마다 척박한 흙과 끝없이 쏟아지는 돌멩이뿐인 어린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평생 그 돌을 골라내 밭가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밭담은 섬을 할퀴는 바닷바람을 걸러주고, 귀한 흙과 씨앗이 날아가지 못하게 지켜줬다. 두 분의 손에는 오래전 계절을 건널 때마다 남긴 온갖 기록으로 단단해진 굳은살이 가득하다.

기계 한 대 없던 시절, 농사를 지탱한 것은 오로지 손끝의 감각과 오랜 경험이었다. 새벽이슬의 양, 잎끝이 처지는 모습, 벌레가 갉아 먹은 자리, 바람에 실린 냄새와 해마다 달라지는 수확량까지 모든 것은 농부에게 중요한 ‘신호’였다. 그때의 몸과 기억에만 남은 기록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데이터’라 부른다.

이제 그 오랜 감각을 새로운 언어로 옮기고 있다. 온실 온도와 습도, 토양 수분, 병해충 사진, 생육 영상, 가격과 소비 흐름이 곧 데이터가 된다. 노련한 농부의 눈과 손이 읽어내던 것들을 이제는 센서가 포착하고, 인공지능이 분석한 뒤 제안한다. 농부의 자리를 꿰차는 기술이 아니다. 농부가 더 안전하게, 더 오래, 더 정교하게 일할 수 있도록 곁을 밝히는 도구다.

농업 현장의 변화는 이미 손에 잡힌다.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은 농장 단위의 기상과 재해 위험을 알려 농가의 판단을 돕는다. 스마트폰으로 작물 사진을 찍으면 병해충 진단과 방제 정보를 제공한다.

“이삭아, 비가 그치면 지금 감귤밭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 농업인이 스마트폰에 이렇게 묻는 시대가 왔다. 농촌진흥청이 고도화하고 있는 ‘AI 이삭이’는 이러한 변화의 한 단면이다. 재배기술과 품종정보, 시장 전망 등 필요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제공하는 농업기술 동반자 역할을 한다.

제주의 옛 농부가 돌을 골라 밭담을 쌓아 바람을 막았듯, 오늘날 농업인은 데이터를 쌓아 기후 위기라는 태풍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경험을 잇는 다리가 될 수는 있다. 경험이 부족한 청년 농업인에게는 첫 판단의 근거가 되고, 홀로 결정해야 하는 고령 농업인에게는 듬직한 조언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 세대의 손을 믿는다. 흙을 만져본 손, 바람을 견뎌본 손, 작물의 표정을 읽어낸 손이다. 앞으로의 농업은 그 손에 인공지능(AI)이라는 새 도구를 쥐고 떠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제주의 돌담이 거센 바람 속에서 밭을 지켜냈듯, 오늘날의 데이터는 기후 위기와 인력 부족이라는 모진 태풍에도 농업을 지키는 현대판 ‘밭담’이 돼줄 것이다. 미래 농업은 실험실에서만 키워지는 게 아니다. 오늘도 밭을 살피는 농부의 손 위에서, 새로운 미래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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