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를 점수로 매기는 모순, 학폭 심의의 한계[내 생각은/류영철]

1 day ago 1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는 가해 학생 조치를 결정할 때 ‘심각성, 지속성, 고의성, 반성 정도, 화해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중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반성’과 ‘화해’다. 교육적으로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를 점수화하는 방식은 되레 제도의 취지를 흔들 수 있다.

무엇보다 ‘화해 정도’ 항목은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학교폭력 사안이 학폭위까지 오는 이유는 대개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고 관계 회복이 실패했기에 외부 판단 단계로 넘어온다. 그런데 심의 과정에서 다시 화해 정도를 점수로 평가한다.

현장에서는 이 모순이 현실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피해자가 접촉을 원치 않으면 가해 학생의 화해 점수는 낮아지고, 형식적 사과나 제한적 접촉이 이뤄지면 점수는 올라간다. 결국 피해자의 선택이 가해 학생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화해는 관계 회복이 아니라 점수를 위한 절차로 변질되기 쉽고,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접촉을 고민하게 만드는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사과’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화해가 무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무엇을 진정성으로 판단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표현의 문제인지, 태도의 변화인지, 시간의 경과인지 그 기준은 상황마다 달라진다. 그 결과 가해 학생은 무엇이 충분한 사과인지 알기 어렵고, 피해자는 납득되지 않는 사과를 받아들이라는 부담을 느낀다.

‘반성 정도’ 역시 비슷한 한계를 지닌다. 사과 편지나 심의 당일의 답변 태도 등이 평가에 과도하게 반영되면서 준비된 문장과 순간의 태도가 실제 변화의 깊이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반성은 장기적 행동 변화보다 평가를 위한 연출로 오해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위의 내용과 피해의 정도, 그에 따른 책임이다. 반성과 화해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점수화될 때 오히려 갈등을 반복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화해는 점수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하고, 반성은 항목이 아니라 과정이어야 한다.

※동아일보는 독자투고를 받고 있습니다. 각 분야 현안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이름, 소속, 주소, 휴대전화 번호 등 연락처와 함께 e메일(opinion@donga.com)이나 팩스(02-2020-1299)로 보내주십시오. 원고가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합니다.


내 생각은 >

구독

이런 구독물도 추천합니다!

  • 사설

  • 고양이 눈

    고양이 눈

  • 횡설수설

류영철 부산외국어대 글로벌미래융합학부 교수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