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제도적 압제’라는 외적 폭력과 ‘본능적 잔혹성’이라는 내적 폭력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를 오가며 살아간다. 사회는 구조의 힘으로 인간에게 폭력을 가해 왔다. 인간은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함으로써 내면의 폭력성을 배설한다. 폭력은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순환이며, 가해와 피해는 그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역사적 상흔 중 하나인 제주 4·3은 사회의 외적 폭력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남영동 1985’, ‘부러진 화살’ 등으로 한국 현대사의 외적 폭력을 담아낸 정지영 감독은 최근 내놓은 영화 ‘내 이름은’에서 제주 4·3을 현재에 대물림되는 폭력의 구조로 보여준다.
영화는 1998년을 배경으로 한다. 정순(염혜란 분)은 여덟 살 때 겪은 제주 4·3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다음 세대인 고등학생 영옥(신우빈 분)은 친구 간의 알력 다툼으로 학교폭력을 당한다. 영화에선 친구 간에 왜 폭력을 행사하는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학교 폭력의 장면과 4·3 당시 본의 아니게 가해자 측 입장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정순의 갈등 구도를 교차 편집한다. 이를 통해 폭력이 어떻게 재편성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왜 1998년이었을까. 당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 채 경제·사회적 폭력이 우리 사회를 억누른 시기다. 영화에선 학교와 공권력이 폭력을 당하는 영옥을 방임함으로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 평생 트라우마를 지닌 정순이 이런 18세 영옥을 바라보는 시선은 8세이던 50년 전 눈앞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어가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목격하는 것과 같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가정이 해체되고 개인이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모르게 된 사회 분위기를 투영한다. 정 감독은 이 두 세대가 서로의 아픔을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로 1998년을 선택했다.
1948년 이데올로기적 갈라치기는 정순의 가족을 해체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정순에게 침묵이라는 생존 전략을 강요했다. 이 시기의 폭력은 정순의 정체성과 이름을 말살하고 그를 역사의 주변부로 밀어냈다. 정순은 자신의 고통을 말할 언어를 찾지 못한 채 트라우마를 기억 속에 꽁꽁 싸맨다. 1948년부터 1998년까지 50년간의 긴 기간은 한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객관화하고 타인을 치유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는 영옥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묻지 않고도 정순이 영옥을 이해하게 하는 원리가 됐다.
영화 제목의 핵심어인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공권력의 폭력 속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생존하지 못했던 정순과 잃어버린 이름으로 대신 살아야 했던 영옥이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정체성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것처럼, 이제 우리도 제주 4·3이라는 역사의 올바른 이름짓기를 통해 그 본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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