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자와 쌓아온 시간과 커뮤니티와 만든 문화가 중요”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의 무게중심은 ‘맥락’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게임은 구현의 수준이 아니라 맥락의 깊이로 결정하고 경쟁해야 합니다.”
강대현 넥슨코리아 공동대표는 인공지능(AI) 시대의 경쟁력으로 ‘맥락 자본’을 제시했다. AI로 게임 구현 장벽이 낮아지는 시대일수록 이용자와 함께 쌓아온 시간과 관계, 신뢰가 게임의 차별화 요소가 된다는 설명이다.
강 대표는 16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넥슨 사옥 일대에서 열린 국내 게임업계 최대 지식공유 행사 ‘넥슨 개발자 콘퍼런스(NDC)’의 키노트 강연에서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하는가’를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이날 8년 전 키노트 무대에서 밝혔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컬링 열풍을 다시 예로 들며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때 ‘컬링’을 재미없는 스포츠라고 여겼지만 올림픽 당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응원할 팀이 생기고 손에 땀을 쥐는 역전 드라마와 다 같이 외칠 수 있는 ‘영미’라는 이름이 생긴 결과다. 경기 규칙은 그대로였지만 ‘맥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에 착안해 당시 라이브 게임 데이터를 열어보니 게임의 만족도를 가르는 건 흔히 구현이라 부르는 그래픽과 사운드, 룰 같은 정적 요소만이 아니었다”라며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건을 겪느냐 하는 동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았다”라고 강조했다. 게임의 재미를 이끄는 본질이 구현의 바깥에도 있다는 결론이었다.
다만 이제는 더 나아가고 있다. 구현이라는 장벽 자체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당장 2015년 ‘스팀’에 출시된 게임은 약 2800개였지만 지난해에는 약 2만개로 늘었다. 반면 이들 게임 중에 리뷰 1000개를 넘기며 주목을 받은 게임은 608개로 전체의 약 3%에 불과했다.
여기에 AI가 더해지며 코드 작성과 이미지 제작, 프로토타입 구현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용자의 시간은 여전히 24시간이라는 점이다.
그는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의 효율이 좋아지면 석탄을 덜 쓸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라며 “일이 쉬워진다고 해서 경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경쟁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뀌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상용 엔진의 보급은 경쟁의 무게중심을 아트와 콘텐츠로 옮겼고 디지털 유통의 보편화는 브랜딩, 개인화, 마케팅 경쟁을 유발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 같은 경쟁의 심화 속에서 중요한 것은 ‘맥락’이라고 주장했다. ‘맥락’은 단순한 설정이나 데이터가 아닌 개발자가 수년, 수십 년간 쌓아온 장르 이해와 취향, 운영 데이터, 밸런스 노하우, 경제 시스템 운영 경험은 물론 이용자 커뮤니티가 함께 기억하는 사건과 감정까지 포함한다. 게임을 만드는 측면에서는 ‘발더스게이트3’의 개발사 라리안스튜디오가 쌓은 CRPG 경험이나 ‘다크소울’ 시리즈로 유명한 프롬소프트웨어의 난이도 철학 등이다. 이를 즐기는 측면에서는 ‘언더테일’이나 ‘다크소울’과 관련한 팬 커뮤니티의 활동이다.
그는 “AI가 코드를 짜고 그림을 그려주는 시대가 왔지만 데이터 너머에 있는 ‘맥락’의 깊이만큼은 프롬프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라며 “AI 모델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어도 만드는 쪽이든 즐기는 쪽이든 시간이 쌓아올린 맥락은 돈만으로는 살 수 없다. 오직 시간으로만 살 수 있고 이것이 AI 시대의 진짜 자본인 ‘맥락 자본’이다”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시간이 흐른다고 자동으로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같은 기간 운영하더라도 어떤 게임은 이용자의 일상에 스며들고 어떤 게임은 추억으로만 남는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이를 금융의 단리와 복리 개념에 빗댔다.
그는 “진짜 싸움은 구현의 경쟁이 아니라 복리 구조 설계 경쟁”이라며 “전작의 경험이 다음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게임 안의 경험이 게임 밖으로 번져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이용자들이 특정 보스에게 계속 사망하는 데이터가 존재하는 경우를 들었다. 데이터만 보면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정답처럼 보일 수 있지만 커뮤니티에서 이용자들이 공략을 공유하고 클리어를 축하하고 있다면 그 보스는 문제점이 아니라 게임의 문화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강 대표는 “데이터 하나만 볼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맥락’과 ‘맥락’이 연결되니 서로 보이게 된다”라며 “한 걸음 더 들어가보면 이용자가 진짜 사랑한 것은 보스가 아니라 도전하고 끝내 해내는 이야기라는 더 깊은 맥락이 드러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알면 같은 감정의 곡선을 그리는 새 콘텐츠를 설계할 수 있고 보스 하나에서 출발한 깨달음이 다음 업데이트, 다음 시즌, 다음 시리즈의 설계 원리로 뻗어나간다”라며 “이런 분석 자체는 AI가 도와줄 수 있지만 그 결과 앞에서 난이도를 지킬지 말지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은 결국 ‘맥락’을 아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유사한 사례도 언급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 직접 경기를 뛰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누군가는 게임을 통해 축구를 접하기도 한다. 중계를 보는 사람도 있고 유니폼을 모으거나 게임으로 축구를 즐기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이런 경험은 축구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서로 이어진다.
‘메이플스토리’의 사례도 있다. 2009년 한 이용자가 이벤트 아이템 ‘검은 보따리’를 커닝시티에서 열어 강력한 몬스터 ‘주니어 발록’이 등장한 사건은 개발사가 의도한 콘텐츠가 아니었지만 이용자들 사이에서 ‘커닝시티 대참사’로 회자됐다. 이후 이용자 창작 플랫폼 ‘메이플스토리 월드’에서는 당시 사건을 재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강 대표는 “이용자는 게임을 소비하지 않는다. 게임 안에서 살아간다”며 “이용자가 보낸 시간이 게임의 맥락이 되고 그 맥락이 다음 이용자의 경험이 되는 복리, 이용자와 함께 이뤄낸 이 결과물은 그 어떤 AI도 복제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끝으로 두 개의 AI를 제시하며 두 AI를 모두 잘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는 흔히 말하는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ce)’, 다른 하나는 이용자와 함께 보낸 시간과 운영 경험, 커뮤니티와 만든 문화가 쌓인 ‘축적된 지능(accumulated intelligence)’이다.
강 대표는 “첫 번째 AI는 모두의 무기지만 두 번째 AI는 맥락의 진가를 알아본 이들의 것”이라며 “구현이 쉬워지는 시대에 우리가 들어야 할 무기는 첫 번째 AI를 누구보다 잘 쓰면서 그 위에 두 번째 AI를 누구보다 두텁게 쌓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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