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원CEO포럼] 인간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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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곤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명곤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영림원소프트랩은 5일, 213회 영림원CEO포럼에 이명곤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초빙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가치있는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삶의 요인들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서 <철학, 인간을 사유하다>를 통해 인간다운 삶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제안한 이명곤 교수는 이번 강연에서 ‘인간다운 삶이 가치 있는 삶이다’를 주제로, △생각하는 존재 △행복을 위해서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욕망과 사랑은 무엇인가 △사회성과 정치 △진정한 소통이란 △인간은 왜 예술을 추구하는가 △진실과 진리 △참된 종교와 죽음 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들려줬다. 다음은 강연 내용.

◆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지혜는 인생을 잘 사는 것에 도움을 주는 실천적인 앎

철학(philosophy)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르다. 가장 일반적으로 철학은 고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랑하다’라는 뜻의 필로스(philos)와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sophia)가 합쳐진 단어다. 즉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중에도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아가페 등이 있는데 필로소피아에서의 사랑은 친구 간의 사랑 즉 우정이다.

지혜는 지식과 비교된다. 지식은 크게 보면 정보이다. 정보만 가지고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내 인생을 잘 사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내 인생을 잘 산다라고 할 때는 내가 체험을 해서 인생에 대해 ‘아 그렇구나?’라는 깨달음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지혜다. 즉 지식이 단순한 앎을 의미한다면 지혜는 인생을 잘 사는 것에 도움을 주는 실천적인 앎이다.

철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이러하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이후에 철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나왔다.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은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며, 중세에는 기독교가 지배했던 시대이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데카르트의 경우 참과 거짓을 구분해내는 것이 철학이라고 했으며, 현대에는 여러 응용 철학이 나왔는데 이를테면 일상 언어 사용의 혼돈을 없애 개념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고 했으며, 과학철학은 기존의 과학이 만들어 놓은 정보를 체계화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했다.

이처럼 철학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데 철학이 다른 학문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한 개인이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는 점이며 그래서 AI와 같은 기계가 흉내 내기 어려운 학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해서도 철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신경계가 고도로 발달한 고등동물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을 넘어서는 알 수 없는 존재다’ 등등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규정들이 나왔는데 ‘호모(Homo)~’가 그것이다. 호모는 라틴어로 인간, 인류를 의미하며, ‘호모~’는 모두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도구(기술)적 인간, 호모 루덴스는 유희적 인간, 호모 아티스티쿠스는 예술적인 인간, 호모 에티쿠스는 윤리적 인간, 호모 모랄리스는 도덕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는 사회적(정치적) 인간, 호모 헐리지오소스는 종교적 인간, 호모 비아토르는 여정(여행하는)의 인간 등 인간에 대한 규정이 매우 많다. 이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갈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빼면 그만큼 인간 존재는 부실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은 동시적이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스님이나 수녀님이라고 해서 유희적인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유희적인 것을 추구할 뿐이다. 인간은 본성상 이것들을 자연스럽게 추구한다. 만일 뭔가 빠지게 되면 욕구 불만이 생긴다. 골고루 다 갖추면 좋겠지만 인간은 주어진 조건, 환경,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부분에 빠질 수밖에 없다.

◆ 사유는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많은 인간의 본질 중에 철학자들이 보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분재의 나무는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뿌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식물도 자기 생존 본능이 있다. 뿌리가 작은데 위가 너무 크면 바람불고 비 오면 넘어진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무를 크게 키우고 싶으면 뿌리를 깊게 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크게 될 사람이 있다. 큰 사람이 되려면 뿌리가 깊어야 한다. 그 뿌리가 뭐냐하면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경제적 수준이 비슷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생각하게 하는 수업 환경에서 자라났다. 프랑스의 직장은 점심시간이 2시간인데 1시간 점심 먹고 나머지 1시간은 직원들끼리 진지하게 대화를 하며 자기가 생각한 아이디어들을 교환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집중이 잘 되고 협력도 잘 된다. 우리나라 직장의 대화 문화는 어떠한가? 대화는 생각을 많이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사유는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철학자들 중에는 사유하는 것을 매우 찬미한 철학자가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에 의하면 살아있지만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말이 안된다. 그럼에도 ‘나의 존재’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충분히 의미있는 말이 될 수 있다. 가령 ‘나의 존재’가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나만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나의 생각, 나의 사유와 유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사유는 가장 근원적으로 나를 규정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나답게 존재할 수 없으며,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남들이 정해놓은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이 인간을 크게 만든다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에메 포레스트는 “인간의 사유는 영적인 시선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참 멋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합성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이미 실현된 게 이만큼 있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또 이만큼 있다는 얘기다.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키는가? 이것이 어떻게 보면 존재한다는 의미다. 내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현할 때 존재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현실태와 가능태가 있다. 훈련만 잘 시키면 탐지견이 될 수 있고 구조견이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철학적으로 ‘본질을 완성하다’라고 한다.

본질을 완성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퀴리 부인의 예를 들어보겠다. 유로화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비싼 돈인 500프랑 지폐의 인물은 퀴리 부인이었다. 퀴리 부인은 폴란드 사람인데 어떻게 프랑스에서 가장 큰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었을까? 프랑스에도 위대한 사람이 많은데 말이다. 퀴리 부인이 존경받는 이유는 라듐 추출 기술(방사선 치료에 활용됨)을 발명한 과학적 업적과 두 번 씩이나 노벨상을 받은 과업 덕분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그녀를 가장 큰 위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그녀의 숭고한 도덕성에 있었고, 이 도덕성은 그녀의 깊은 사유에서 나왔다. 퀴리 부인은 라듐 추출 기술에 대한 국제적 특허 신청을 하라는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기록물들을 우편으로 보냈다. 편지에는 “이것은 전 인류를 위해 자연이 준 신의 선물이므로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퀴리 부인의 이 행위에는 자유, 평등, 박애가 깔려있었다. 프랑스의 국가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다. 퀴리 부인은 프랑스의 이 국가 정신을 세계에 가장 잘 알린 사람이었다.

퀴리 부인의 도덕성이 깊은 사유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인간의 정신은 조금 더 나은 것을 자꾸 찾게 되어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마지막에 가장 좋은 것이 남는다. 데카르트는 “사람마다 재능이나 환경은 다를 수 있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다 똑같이 타고난다. 이 생각하는 것을 깊이 하면 할수록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했다.

◆ 도덕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인간이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도 ‘깊이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왜냐하면 도덕 즉 모럴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멘탈에서 파생된 용어다. 인간의 정신적인 특성은 다양하지만 그 중 하나가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즉 인간의 정신이 가진 본성적인 기질이 항상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어줄 것을 바라지만 자신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꺼려한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문호 폴 발레리는 “도덕이란 일종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기술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하는 혹은 마음에 드는 것을 하지 않는 기술이다”라고 했다. 사실이 그렇다. 도덕적이란 말 그대로 우리의 본능적인 지향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힘겨운 어떤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존재의 자연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도덕적 존재를 창조한 것이야말로 최대의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 말은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 혹은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 같지만 실제로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삶은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미리 말하자면 도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덕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행복은 불가능하다. 행복이라는 것은 나에게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도덕적이라는 것에는 나한테 소중한 것, 가치 있는 것,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현대 철학자 페르디낭 알키에는 “철학적으로 말해 죄란 아무 것도 행위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라는 삶을 경계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로 항상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 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가치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말이며, 우리가 잘 산다고 할 때 이는 보다 가치있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가치있는 것을 소유하거나 보다 가치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인간이 보다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생존만을 강조하고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을 말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와 같다.

철학자들은 저마다 행복을 말하고 있다. 세네카는 “각자는 혼자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그들 스스로 충분한(만족하는) 그것이다”, 보리스 비앙은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그것은 각자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들의 핵심은 행복으로의 길은 각자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남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다르며, 그래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는 남들이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행복이 도덕적인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행복은 결코 어떤 특정한 조건만 갖추게 되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구해야만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며, 그것도 어떤 특정한 내적인 조건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적인 것이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어떤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복은 즐거움과 다르다. 즐거움은 순간적인 것이지만 행복은 지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즐거움과 기쁨은 차이가 있다. 즐거움은 가령 포도주 한 잔의 즐거움, 제주도 여행의 즐거움 등을 말한다. 반면 기쁨은 가령 벗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 중요한 시험에 통과했을 때의 기쁨 등이다. 즐거움은 언제 어느 때나 원하기만 하면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기쁨은 오랫동안 나의 삶의 소중한 그 무엇에 관련된 것을 전제한다.

사회나 국가의 행복 지수를 얘기하는데 사실 행복은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 문학가 폴 클로델은 “행복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수단이다”라고 했다. 이를테면 일본의 장인정신의 본질은 그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진짜 예술하는 사람들을 보면 돈을 벌기보다는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행복감을 느낀다.

◆ 인간은 무엇을 욕망하여야 하는가?…사랑은 최상의 가치

욕망이란 무엇을 ‘욕구하고 갈망하는’ 행위다. 만일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인간사회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욕망을 마치 인간이 무엇인가 행위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동인’처럼 고찰하고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우리이지 않은 것,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욕망과 사랑의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앞에서 모럴은 지금 나한테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는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욕망한다는 것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며, 그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첫걸음이다.

욕망은 단순한 욕구나 희망과 무엇이 다를까? 단순한 욕구는 예를 들면 정당하게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욕망이라고 하지 않는다. 욕망은 마음으로 즉 의지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단순히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갈망한다고 하는 것이다. 갈망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일 때는 ‘희망한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욕망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올바른 욕망은 위대한 것을 낳게 한다. 욕망이 올바른 길을 잃게 되면, 그것은 인간적 삶에 있어 비극을 가져오게 되지만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면 사랑으로 변모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위대한 것을 산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전제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갈망’ 혹은 ‘욕망’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이 소유욕이 아닌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로 변모한다면 여기에는 위대한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즉 인간 욕망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랑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영어나 우리 말에서는 좋아하다와 사랑하다가 구분되지만 유럽 사람들은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유럽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그래서 사랑을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서 고찰하고자 한다면 사랑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움, 공포, 절망, 기쁨, 환희 등 모든 정념의 뿌리는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모든 자연적인 욕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라는 말이다. 먹고 마시며, 아름다운 것을 보려하고, 누구를 좋아하는 것 등은 모두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본성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본성적인 사랑을 넘어 심미적인 것을 추구한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것은 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 뿌리는 같다. 좋아한다는 것이 기질적인 문제이며 주로 감각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즉 좋아한다는 단순한 감각적인 것 그 이상의 무엇, 삶의 의미나 정신적인 명분 등이 첨가될 때 이는 이미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이 윤리, 도덕적 의미로 나아갈 때 사랑하는 것이 된다. 무엇을 사랑하게 되면 책임감이 생긴다. 유럽이나 일본 사람을 보면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책임감이 없어졌다. 오래 사귀었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싫다며 떠나버리고, 이혼율도 높다. 책임감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덕의 부재로 볼 수 있다.

사랑은 최상의 가치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치 있게 하는 가치들의 가치이다. 빅토르 위고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나에게 말해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인가를 말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어느 순간 나 자신의 존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표현에 인색하다. 무엇을 할 때나 사랑한다는 게 습관이 돼야 한다. 산책을 건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게 되면 길고양이나 까치, 꽃봉오리 같은 것이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많은 것이 보이고, 삶이 가치 있게 되고 충만해진다.

◆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하려면 공동선을 실현해야

사람이 왜 사회를 형성해서 사는가? 이에 대해 많은 사회학자들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목적도 행복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공동선이다. 뒤르켐은 “만일 한 공동체가 국가 권력에 복종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복종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다만 공동선을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유럽에서 8년 반 정도 살아봤는데 한국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다. 유럽에 비해 가장 큰 단점은 공동선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선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60% 이상은 공동선과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교통 신호등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길 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 모여 있는 이 호텔도 공동선이다. 호텔에 평생 한 번도 못 오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이 호텔은 누구나 와서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공동선인데 한국 사회는 이상하게 갈라져서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 전라도 경상도, 좌파 우파, 심지어는 회사에서도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한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싸운다. 집단 이기주의 강한 셈이다. 서울이라는 관념을 벗어나야 대한민국이 보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을 벗어날 때 세계가 보이고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인드가 있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한다.

과거 학교 생활통지표에 선생님들은 공부를 못한 학생에게 성적은 낮지만 친구가 많다는 점을 들어 사회성이 좋다고 적었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친구가 많은 게 아니라 공동선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만약 친구와의 유대관계가 끈끈한 것을 사회성 좋다고 평가한다면 아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사회성 좋은 집단은 조폭들일 것이다. 어쨌든 이 사회성이 좋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람을 키우려면 어릴 때부터 교육이 매우 중요할 듯 싶다.

그러면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법의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덕적 선의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정의(즉 새로운 법)에 도달한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다. 이 법이 처음 나올 때 탈도 많고 말도 많았지만 몇 년 지나서 오히려 편하고 사람들 마인드가 바뀌었다.

루소는 “법들은 우리들에게 정의롭게 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배우게 한다”고 했으며, 몽테스키외는 “정치적인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이며, 법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강요받지 않을 자유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뭘 할 수 있거나 또 부당한 것을 강요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반대로 나쁜 법이 있는데 공동선을 파괴하는 법, 특정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법, 그리고 지금 있는 좋은 룰을 파괴시키는 법이 그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자꾸 말도 못하게 하고, 정의롭게 되고 싶은데 못하게 하며, 자꾸 부당한 것을 강요하는 것도 나쁜 법이다.

◆ “소통하고자 한다는 것은 인간적이고자 하는 것”

왜 인간은 소통을 갈망하는가?,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어린 아기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소통이 필요하다. 우유와 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통 역시 삶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요소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소통은 단순히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욕구이자 이를 통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소통’이란 말 그대로 ‘막힌 것을 통하게’하는 것으로 서로 이해하는 행위 즉 상호적이다. 모든 사람은 주관성 속에서 살아간다. 소통이 되려면 상대방의 주관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나의 주관성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서로 이해하는 행위를 철학에서는 ‘상호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이 성립될 때 이해와 존중이라는 마음 속의 깊은 교감을 의미하는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는 것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상대방이 존재하는 그 지평, 처해있는 상황에 나 자신을 함께 위치시키는 것이 공 상호주관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진정한 소통의 토대가 된다.

소통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소통하는 그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통을 위해서 하는 말들, 표현들, 비유들, 몸짓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형성할 수 있다. 누구도 혼자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다. 서로 관계성이 있는 곳에서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다.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을 듣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통해 표현되지 않은 것,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다. 진정한 소통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평정되고. 긍정적이고 선한 생각을 가질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의식과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이미 절반의 소통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좋은 의식,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소통은 발전하게 될 것이다.

참된 대화,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벗이 되어야 한다. 벗은 예를 갖춰야 하지만 전혀 장벽이 없는 그러한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구와도 벗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예술은 탁월한 소통 방식

인간은 왜 예술을 추구하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게 예술이다. 입체파 화가인 조르주 브라크는 “학문은 안심하게 하지만, 예술은 동요하게 한다”고 했다. 예술이란 우리의 마음 속에 파문을 던지는 그 무엇이다. 내 가슴 속에 파고들면서, 무언가 전율을 느끼게 하거나, 깊은 평화를 일깨우거나 혹은 세계의 전혀 다른 모습, 전혀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해줄 때 나는 감동하게 된다. 한마디로 예술은 잠들어 있는 셰계를 일깨우는 것이다.

예술은 감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베토벤은 “내가 음악을 작곡하는 이유는 내 영혼이 감동하는 무엇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며, 빅토르 위고는 “감동한다는 것은 삶을 배운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한다는 것은 인생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보고 지나친 그 무엇의 가치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탁월한 소통의 방식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성모의 비애)>라는 조각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가 아들인 예수보다 젊게 표현됐다는 비평을 받기도 했는데 어쨌든 성모 마리아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하다. 이 작품을 정면에서 보면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보이고 위에서 보면 예수가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 하나로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마음을 전해준다. 말이 필요없는 탁월한 소통이다.

반 고흐의 <슬퍼하는 노인>이라는 그림은 어느 노인이 주먹 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무 의자에 앉아 흐느끼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당시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이 정신병원에서 환자복 입고 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사회학자 나탈리 에니히는 이 그림을 두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흐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고흐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림밖에 없었다. 그림을 그려봤자 아무도 사가거나 봐주지 않겠지만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울지 마세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 진실은 삶의 제일원칙이 되어야 한다

영미 속담에 “진실이 최선의 정책이다”는 말이 있으며,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링컨은 “누구도 거짓으로 성공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기억력이 좋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짓을 경계하고 있다. 거짓말은 계속해서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므로, 자신이 이전에 했던 거짓말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결국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진실보다 거짓이 만연하고 날이 갈수록 진실한 것보다 거짓된 것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에서 8년 반을 살면서 가장 듣기 좋았던 용어는 ‘오네뜨망’이었다. 불합리하거나 진실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주저없이 “오네뜨망하게 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네뜨망은 깨끗함, 정당함, 명예로움, 당당함, 진실함 등의 의미를 담은 용어이다. 거짓 인생은 손쉬우나 거짓 행복을 주고, 진짜 인생은 힘겨우나 진짜 행복을 준다.

진리는 진실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진실이 진리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끄 레비는 “가장 나쁜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아, 이상,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은 나의 진실의 척도이다. 일반인도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강의의 마지막 주제는 참된 종교다. 마르크스는 ”모든 종교는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여 인간을 위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빈곤하다는 의식을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인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편협한 관점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만이 현재를 똑바로 볼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어원을 보면 동양에서 종교는 근본적인 것에 대한 배움이며, 서양에서 종교는 신성한 것과 다시 연결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삶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종교인은 상황이 매우 열악해도 희망을 잘 잃지 않는다. 종교는 현재를 밀도 있게 살게 하고 새로운 도덕을 산출한다. 또 삶의 이정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다.

맺음말로, 철학은 인간의 삶을 올바르고, 참되게, 풍요롭게 해주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유용한 학문이다. 가끔 틈을 내어 철학적 사유를 해본다는 것은 내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영림원CEO포럼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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