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인 정약용과 약전 형제는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후세에 평가받는다.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천재로 불렸고 일찍이 관직에 입문했으며,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정조가 총애했던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낙후된 조선을 혁신할 전방위 방안을 내놓았던 선각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지 확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나고 개방적이었으니 조선 땅은 좁았고 뜬구름 잡는 지식과 틀에 박힌 사상은 진부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서학(천주교)에 입교했지만, 이는 젊은 시절 큰 화(禍)를 불렀다. 순조 즉위 후 일어난 신유박해 때 모진 심문을 받은 끝에 배교(背敎)로 목숨만 부지했다. 당연히 둘의 관운은 막을 내렸고, 땅끝 유배지로 쫓겨났다. 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생을 마쳤고 약용은 18년간 강진에 유배됐다가 귀향해 저술과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필자 같은 범부(凡夫)라면 백번 좌절했을지 모를 비극이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일로 자멸하거나 목숨을 끊는 이들이 허다했다. 하지만 두 형제는 역시나 비범했다. 이들은 자신에게 닥친 감당하기 어려운 봉변, 추락한 지위, 낯선 환경 등에 좌절하거나 비관하는 대신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했다. 오히려 여유로워진 시간을 학문 연구에 쏟아부음으로써 동시대 지식인들이 범접 못 할 경지를 개척해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함께 붙잡혔으나 능지처참 같은 야만적 형벌로 순교한 친형제 약종, 조카사위 황사영 등과는 달리 실용적 사고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유배지에 갇힌 죄인의 고통이 이루 말 못할 만큼 극에 달했겠지만, 이들은 현명했다. 주어진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히 구분해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원망, 증오, 복수, 낙담, 푸념, 비관 등이 자신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잘 알았다. 요즘 용어론 '메타인지'가 높았던 듯하다. 두 형제는 더는 '공부'가 신분 상승, 부의 증식과 무관해졌음에도 학문에 전념하는 것으로 헛된 욕망을 지워냈다.
이미지 확대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유배지의 아름다운 자연을 한껏 즐기며 시름을 달랜 것도 두 형제가 같았다. 산과 바다를 틈날 때마다 보고 유람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런 행위를 통해 유배지의 현실에 동화하려 애썼으며,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새롭게 발견하려 했다. 특히 섬에 갇힌 정약전은 형이상학과 고담준론 대신 물고기를 관찰하고 연구해 기념비적인 과학 서적(자산어보)을 남겼다. 그는 섬 촌부들과 술 마시고 놀았고, 섬 처녀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며, 뱃사람의 자식들을 가르치는 등 완벽한 섬사람이 됐다. 현지화만이 고통과 번뇌를 잊고 살길이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두 형제는 혈육이자 유배 동지로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어부들을 통해 서신을 전했다고 한다. 이들은 편지에서 각자 유배된 자연환경이 더 살기 좋고 아름답다며 아이처럼 자랑하고 다투기도 했다. 둘은 편지로 근황만 전한 게 아니라 학문적 성과도 나눴다. 다산은 둘째 형 약용의 학문적 조언이 있었기에 자신의 학문이 더 높은 완성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역저가 탄생한 배경에 형 약전의 힘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셈이다.
이미지 확대
(수원=연합뉴스)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형이자 조선후기 문신인 정약전(丁若銓.1756~1801)이 한국 천주교 최초 세례자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에게 보낸 간찰(편지). 수원화성박물관은 오는 10월2일부터 2개월간 '정조(正祖)의 명신(名臣)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기획전시회를 개최한다.<<지방기사 참고,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2010.9.20
지금 당신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이 못 견딜 만큼 심적 한계에 달했다면, 다산 형제가 비극에 대처했던 태도와 방식에서 작은 위안과 도움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끝이 없을 것 같은 터널이라도 그들처럼 어둠과 습기에 적응해 과거엔 몰랐던 새로운 빛을 찾아내려 한다면 언젠가는 출구를 만나게 된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11월15일 06시33분 송고



![머리카락보다 얇고 인체 완벽 밀착…'THIN'이 신체 모니터링 [지금은 과학]](https://image.inews24.com/v1/54dfa03c1c4322.jpg)

![SK하이닉스 "엔비디아와 차세대 SSD 개발 중…속도 최대 10배 빠르다" [강해령의 테크앤더시티]](https://img.hankyung.com/photo/202512/01.42641375.1.jpg)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