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과시형 K-결혼식, 구시대 유물로 작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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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 느는 AI 시대인데 공장형 웨딩에 수천만원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최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결혼 예식에 드는 비용만 평균 2천200만원에 육박했다고 한다. 서울 강남권은 거의 3천600만원에 달한다. 대관료, 식대, 속칭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등에 들어가는 돈이다. 살 집에, 새살림에 예물과 신혼여행 비용 등도 마련해야 하니 결혼할 때 한 번에 써야 할 비용이 큰 부담이 된다. 강남권은 평균 식대도 9만 원을 넘었다니 식장에 갈 경우 부조금을 10만 원 내기도 겸연쩍다.

이미지 확대 결혼식 풍경 (기사 내용과 상관 없음)

결혼식 풍경 (기사 내용과 상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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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돈 없어 결혼 못 한다는 말이 나온다.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데, 일단 결혼해야 아이를 낳을 것 아닌가. 특히 젊은 남성들의 결혼 기피 현상이 더 빨리 확산 중이다. 성평등 시대라면서 살 집은 남자가, 세간 살림은 여자가 마련하는 문화가 남아있는 건 누가 봐도 모순이다. 과거엔 남성이 월세 단칸방이라도 얻으면 신접살림부터 차려 함께 성장한다는 문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자가주택이 있어야 예비 신랑 합격선에 든단다. 하지만 소수 상류층이 아니라면 사회생활을 한 지 10년도 안 된 젊은 남성들에게 집이 없는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돈 없어 결혼 못 한다는 푸념이 자연스러워진 현실이라면, 생각 틀을 혁신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 포기가 다른 것도 아닌 경제적 이유라면 돈을 덜 쓸 방법만 찾으면 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지출부터 과감히 줄이는 게 지혜롭다. 먼저 눈에 띄는 게 대한민국 특유의 과시형 결혼식이다. 돈이 없다면서 본행사는 통상 30분 남짓한 천편일률 공장형 예식에 2천만~3천만 원을 쓰는 건 이상하다. 호텔·야외 예식은 여유 있긴 하나 재정적 무리가 가고, 형식은 여전히 판에 박혔다. 신혼집 구하느라 시작부터 빚을 지는 예비부부들이 예식장과 피로연의 평판까지 신경 써야 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참 피곤하다.

새 출발을 알리는 성스러운 자리가 내가 감당할 선을 넘는 과소비 행사, 누가 더 화려한지 비교하는 경연장처럼 전락한 이유는 뭘까. 우선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한국인 특유의 체면 문화, 남과 다르면 소외되고 뒤처진다고 여기는 집단주의적 국민성이 꼽힌다. 소셜 미디어 발달은 이런 '비교 지옥'을 강화했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식은 양가의 '사회적 계급'을 입증하는 이벤트처럼 보일 정도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서 내면의 만족보다 타인 시선에서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의존적 자아'가 강하다는 증거다. 이런 정서적 결핍은 낮은 자존감과 관련 있다. 자기만족감과 개성이 모자랄수록 외형적 보여주기로 내면의 부족함을 덮으려 하고, 타인과 비교, 뒷말, 험담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부조(扶助) 문화도 과도하게 예식 규모를 키우는 데 일조한다. 뿌린 축의금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본전 생각'은 굳이 안 불러도 될 하객들에게 청첩장을 보내게 만든다. 이에 따라 식장과 피로연장 규모도 커져야 하고, 예식 비용은 더불어 증가한다. 정말 축하하러 식장을 찾는 친지와 지인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빚 갚듯 식장에 들르거나 부조금만 보내기도 한다. 예식 비용이 갈수록 올라가니 축의금을 얼마 내야 하는지가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결혼식이란 경사의 본질이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이젠 바뀔 때가 됐다. 보여주기에 치중할수록 내실은 사라진다. 남들이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 예비부부의 가치관과 형편에 맞는 '둘만의 방식'이 세련되고 합리적이란 인식이 자리 잡도록 사회 전체가 먼저 변해야 한다. 예식 비용이 줄면 결혼 진입 장벽도 조금이라도 낮아지니 저출산 해법이기도 하다. 행사비를 아껴 주거 자금에 보태거나 미래 종잣돈으로 두는 게 젊은 신세대다운 현명함이다. 경제 강국 소리를 듣기 시작했으니 다른 대부분 선진국처럼 집, 동네 회관, 교회 등에 정말 가까운 사람만 초대하고 예복은 물려받는 문화를 소화할 의식 수준에 오르지 않았을까. 축의금도 회수할 투자금이나 부채가 아닌 마음에서 진정 우러나 주는 축하 선물이라 여기면 '부조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첨단 인공지능(AI)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구조는 점점 개인화하고 1인 가구는 늘고 있다. 결혼 기피나 이혼율 증가는 이런 거대한 변화의 일부 단면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관계는 '양' 대신 '질'로 평가될 테니,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놓고 과시형 잔치를 여는 건 변화를 거스르는 구시대 유물로 점점 취급받을 것이다. 작은 방에 양가 가족과 오랜 친구 몇 명만 불러 백년가약을 맹세하고 가벼운 식사로 마무리하는 대신, 아낀 비용과 축의금은 새 가정의 탄생에 필요한 예산에 쓰는 지혜를 보고 싶다. 예비부부가 골치 아픈 예식 행사 준비에 몇 달간 매달리는 대신 두 개의 이질적 세계가 만나 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운다는 행위의 진짜 현실적 의미를 알려주는 교육을 함께 받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런 프로그램을 결혼을 위한 필수 이수 과정으로 만들면 이혼율이 급락할 거란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04일 11시42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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