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IBM의 전산기가 들어왔다. 컴퓨터가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려는 과도기,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 흑인 여성 몇 사람이 재빨리 포트란 배우기에 나섰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변화를 위협이 아니라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 사례를 소재로, 인공지능(AI)이 바꿔놓고 있는 가파른 변화에 마주한 오늘의 우리를 조명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기술의 전환기마다 승패를 가른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만들어낼 질서를 누가 먼저 제시하느냐다. 이제 AI를 단순히 ‘규제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AI 확산기에는 통제의 강도보다 ‘책임의 기준’이 중요하다. 노동자의 불안, 소비자의 우려, 시민사회의 의심을 누가 먼저 다루느냐가 핵심이다. 정부는 원칙을 세울 수 있지만, 현장의 해법까지 먼저 마련하긴 어렵다. 기술의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가장 가까운 기업이 나서서 신기술을 둘러싼 제도적, 정치적 여건과 여론까지 고려해 정부가 참고할 현실적 기준을 선제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비시장 전략이 중요한 이유다.
각국의 대응은 조금씩 다르다. 유럽연합(EU)은 유연한 제도적 틀 속에서 기업 참여를 독려하는 모델을 마련했다. AI법은 2025년부터 시행됐지만 모든 규제를 일괄 적용하지 않고, 위험도와 범위에 따라 순차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동시에 법 시행 전인 2024년부터 ‘AI 팩트(Pact)’를 통해 기업이 스스로 거버넌스 전략을 세우고, 고위험 시스템을 식별하고, 내부 역량을 높이도록 유도했다. 법 시행의 시차를 기업의 준비 기간으로 바꾼 것이다.
싱가포르는 규제보다 작동 기준을 먼저 만들었다. 2019년 ‘AI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를 내놓고, 2022년에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AI 검증 가이드라인(AI Verify)’을 도입했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참여한 AI검증재단을 통해 민간의 실증 결과를 축적하고, 정부는 이를 제도와 가이드라인으로 연결했다. 규제를 앞세우기보다 기업과 함께 규범을 마련해가고 있다.
한국도 올해 세계 최초로 AI기본법 시행에 들어갔다. 정부는 시행 초기 최소 1년의 계도기간과 지원 데스크 운영 방침을 밝혔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민간이 따라가는 쪽이다. 고영향 AI 해당 여부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구조지만, 기업이 자발적으로 검증, 실증한 결과를 제도에 반영하는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우리도 산업 시대의 법규 질서보다는 기업이 스스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제도적 공간 마련이 시급하다.
AI 전환은 결국 노동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AI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구도로만 보는 건 단견이다. 한국은 이미 저출생과 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이 구조화하고 있다. AI는 일자리를 줄이는 기술인 동시에, 부족한 노동을 보완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실질적 위험은 일자리 수의 감소보다 질의 분화다. 생산성 혜택은 고숙련·고임금 쪽으로 몰리고, 저숙련·저임금 쪽은 더 취약해질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의 56.3%는 AI 도입 논의에서 소외됐고, 노사협의 비중은 6.9%에 그친다. 결국 핵심은 전환 설계가 될 것이다. 누가 재교육을 받고, 누가 이동하며, 누가 보호받는지를 기업이 먼저 제안해야 한다.
덴마크 플랫폼 기업 힐프는 2018년 덴마크노조연합 3F와 단체협약을 맺고, 노동자가 누적으로 100시간 이상 일하면 자동으로 고용 보호 체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플랫폼의 유연성은 유지하되 연금, 유급휴가 등을 보장하며 혁신과 보호를 조화시킨 것이다. 분쟁 후 해명이 아니라, 사회가 수용할 선을 먼저 제시한 사례였다. 국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대통령은 노동계와 사회적 대화를 제안했고, 삼성·LG 등은 AI 거버넌스와 위험 식별 프로세스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AI를 어떻게 통제하고 설명할 것인가’를 입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업이 할 일은 분명하다. 정책과 규제를 기다리지 말고 길을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AI를 최고경영진의 사회적 책임 의제로 격상하고, 생산성 계획과 함께 노동 전환 계획을 수치로 제시해야 한다. 정부에 요구만 하지 말고 검증 가능한 파일럿 모델을 내놔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외부에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부는 결국 준비된 기업의 사례를 따라 제도를 만든다.
미래의 주인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이해하고 길을 낸 기업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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