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 위의 춤판 같은 인생…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17 hours ago 3

〈113〉 ‘시라트’로 본 천국으로 가는 길

영화 ‘시라트’의 등장인물이 홀로 사막을 걸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 황량한 풍경을 ‘천국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유의 공간으로 삼는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영화 ‘시라트’의 등장인물이 홀로 사막을 걸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 황량한 풍경을 ‘천국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유의 공간으로 삼는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영화 ‘시라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리베르 라세 감독의 영화 ‘시라트’의 배경은 세계 최대의 지뢰 매설 지역 중 하나인 모로코 장벽과 그 주변의 사막이다. 이처럼 현실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이 영화를 현실 묘사로 간주할 수는 없다. 마치 한 편의 논문처럼 이 영화는 특정한 결론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이 논문의 연구 질문은 무엇인가. 바로 제목인 시라트다.

아랍어로 시라트(Sir ̄at)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니, 이 영화는 “도를 아십니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인간이 따라야 할 도를 알고 싶은 사람이나 천국으로 가는 길이 궁금한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면 된다. 이것은 천국으로 가는 여러 길을 소개한 뒤, 그중 어느 길이 진정한 길인지 결론을 내리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문’의 결론에 동의할지는 영화를 보는 당신 몫이다.

테크노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는 군중. 영화는 탈주와 해방의 환상이 또 다른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테크노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는 군중. 영화는 탈주와 해방의 환상이 또 다른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사막을 헤매고 있듯이, 여기 두 사람이 모로코 사막을 헤매고 있다. 아버지 루이스와 그의 어린 아들 에스테반이다. 루이스는 집 나간 딸 마르가가 사막에서 열리는 레이브 파티(테크노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는 파티)에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춤추러 온 사람들에게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부지런히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는 딸이 가족을 만나면 반가워할 것이라고 장담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가족이 반가울 거라면 소식을 끊고 잠적할 리 없다. 요컨대 루이스의 가족은 어딘가 부서져 있다. 어디 루이스 가족뿐이랴. 파티에 온 노숙자 그룹 역시 자신의 원가족을 버리고 타인들과 어울려 사는 중이다. 이렇게 ‘시라트’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면서 시작한다. 세상에는 (조부모)-부모-자녀로 이뤄지는 이른바 정상 가족의 화목함이나 유대를 찬양하고 설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시라트’에 따르면 정상 가족 따위에 천국으로 가는 길은 없다.

레이브 파티는 열기를 더해 가는데, 갑자기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다는 방송이 울려 퍼진다. 이내 군인들이 난입해 파티를 중지시키고 사람들을 모처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노숙자 그룹이 군대의 통제를 따를 리 만무하다. 그들은 더 깊은 사막 속으로 질주한다. 딸을 찾아야 하는 루이스와 에스테반 역시 그들을 쫓는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노숙자 그룹도 부자의 호의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천국으로 가는 길은 대안 가족에 있는 걸까. 이 세상에는 정상 가족의 허구를 폭로하고 대안 가족을 지지하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천형처럼 주어진 가족을 과감히 떠나 주체적 선택을 통해 새로 만든 가족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수많은 스토리들. 그러나 ‘시라트’에 따르면 대안 가족에도 천국으로 가는 길은 없다. “원래 가족보다 이 가족이 좋아”라는 대사는 오히려 앞으로 벌어질 참극을 예고하는 주문처럼 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대안 가족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참혹하게 죽어 나간다. 그렇다면 ‘시라트’는 탈주를 옹호하는 영화인가. 전쟁이 났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춤판의 사람들을 이송해 갈 때, 노숙자들은 과감히 곁길로 빠져 탈주한다. 어린 에스테반은 그 모습을 보며 멋지다고 환호한다. 군인들의 강제를 피해서, 정상 가족의 굴레를 피해서, 불편을 감수해 가며 불모의 사막을 밤낮으로 질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실로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간 얼마나 많은 예술과 철학이 기성 제도의 억압을 비판하고, 탈주의 삶을 찬양했던가.

그러나 해방의 쾌감은 옥죄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그 순간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정주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조만간 탈주의 피로가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라트’는 탈주의 여정이 사실은 지뢰밭임을 보여준다. 군대는 피했지만 사막의 지뢰는 피하지 못한다. 주인공들은 이제 한 명 한 명 몸이 터져 죽는다. 그쯤에 이르면 관객은 차라리 부자유를 감수하고 군대를 따라가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정상 가족도, 대안 가족도, 탈주도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오직 정신 승리뿐인가. 모든 인생의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 환각제의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래서 주인공들은 사막 한가운데로 차를 몰고 가서 대형 스피커를 세워 놓고 환각제를 마시며 트랜스 상태에 빠져 정신없이 춤을 춘다. 그렇게 댄스 스텝을 밟아 가던 도중, 동료 제이드는 그만 지뢰를 밟고 몸이 터져 죽는다. 동료 톤인은 그에게 달려가지만, 그 역시 또 지뢰를 밟고 몸이 터져 죽는다. 그들이 춤추던 발밑에도 지뢰가 매설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라트’는 관객을 테크노 음악과 환각제의 세계로 초대하지만, 그것들 역시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도를 아십니까. 도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레이브 파티에서 시작한 영화는,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차 지붕에 몸을 실은 장면으로 끝난다. 자, 기차가 달린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누런 사막 위로 기차가 달린다. 세상 곳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인데, 먼지를 막아 줄 차양조차 없는 기차가 사막 속 외길 철로 위를 달린다.

화가 알프레트 쿠빈의 ‘지옥으로 가는 길’(1903년). 군중이 떼 지어 몰려가는 넓은 길은 영화가 말하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천국의 길’과 대비된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화가 알프레트 쿠빈의 ‘지옥으로 가는 길’(1903년). 군중이 떼 지어 몰려가는 넓은 길은 영화가 말하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천국의 길’과 대비된다. 사진 출처 IMDb·퍼블릭도메인
이 외길 철로가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시라트가 아닐까. 영화 속 내레이션은 말한다. 천국으로 가는 시라트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외길이라고. 바로 그 점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과 다르다. 알프레트 쿠빈의 그림 ‘지옥으로 가는 길’을 보라.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어서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간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는 길은 다르다. 지뢰가 지천인 세상에서 살아남아 천국에 가려면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외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논문 같은 영화 ‘시라트’가 내리는 결론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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