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창덕]어이없는 네이버의 ‘지식인 파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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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로 여자 배우는 여러 동료들 가운데 자신의 외모가 가장 낫다는 취지의 댓글을 포털에 남겼다. 한 남자 배우는 피임 관련 질문에 ‘수위’가 높은 조언을 했고, 다른 남자 배우는 ‘쉽게 돈 먹겠다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주식 투자자들을 비판했다. 같은 대학 남학우들의 음주 성희롱을 감싸는 듯한 글을 올린 정치인도 있다. 한때의 치기가 발동해서 썼거나, 지금 돌아보면 당장 주워 담고 싶은 것들이지만 오래전 익명으로 남긴 글이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나 실명으로 ‘파묘’당하기 전까지는…. 이들의 과거를 허락 없이 공개한 것은 해커가 아니라 게시판 운영자인 네이버였다.

▷‘지식인(iN) 파묘’ 사건은 3일 일어났다. 네이버는 자사에 인물정보를 등록한 세무·법률·의학 등의 전문가 프로필에 ‘지식인’ 링크를 추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선수, 게이머, 기업인까지 다양한 직종의 유명인들에게도 링크가 표시됐다. 이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지식인이란 코너에 과거 익명을 전제로 쓴 질문이나 답변이 여과 없이 노출됐다는 것이다. 네이버가 하루 만에 시스템을 이전으로 되돌렸지만 이미 1만5000여 명이 과거에 쓴 글로 소환된 뒤였다.

▷지식인 링크는 네이버가 6개월 전에 업데이트를 예고했던 서비스다. 그래서 네이버의 ‘기술적 오류’라는 해명은 더 궁색해 보인다.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신규 서비스를 내놓을 때는 알파, 베타 등 여러 테스트를 거치며 오류를 수정한다. 작년 매출액이 12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포털이 이런 기본적 절차에 실패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네이버는 6일 공식 사과하면서 피해 예방과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기술 인력 몇 명에게 책임을 지우고 넘길 일은 아니다.

▷글 작성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명으로 썼던 글이나 자의로 출연했던 방송 화면 중에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가 있는데, 하물며 익명 글은 오죽하겠나. 개인 사정이나 주변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익명이어야 했을 경우가 많았을 터다. 일거수일투족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더 그렇다. 다른 이용자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익명성을 믿은 게 바보였다”, “이건 네이버가 선을 넘은 거다” 등의 비판이 나온다.

▷네이버는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개인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만큼 보안이 뚫리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래서 회사 차원에서는 생존을 걸고 보안 시스템에 투자해야 하고,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보다 철두철미한 보안 인식이 요구된다. 이번 지식인 사건으로 이용자들의 실망감이 유독 큰 이유다. 국가대표 인공지능(AI)까지 도전했던 네이버가 이 정도의 정보 보호 수준에 머물러 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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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논설위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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