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묶인 선박 26척… 우리도 당사자
‘70년 수혜’ 한미 동맹, 한국 몫 해낼 때
“파병 반대” 다수인 여론은 ‘무서운 고양이’
좌절해도 총대 메는 소신 정치인 나와야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첫째, 유조선 등 우리 배 26척의 발이 묶였으니, 한국은 당사국이다. 마땅히 해야 할 자국 상선 보호 역할을 요청받은 것이다. 둘째, 한미동맹은 지난 70여 년간 미국에 의존하던 관계를 벗어나 한국이 국력에 걸맞게 기여하도록 밑그림을 그려 왔다. 한국이 예산을 더 쓰는 데는 양자가 이미 합의했다. 여기에 더해 주한미군의 대중국 견제 역할을 어떻게 한국이 수용할지, 이번 파병 요청처럼 한국이 정치적·군사적 리스크를 어떻게 져야 할지를 치열하게 논의 중이다. 셋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군사와 투자·교역 이슈를 뒤섞어 버렸다. 거액 투자 압박과 상호관세를 연동시켰듯이 이번 요청도 결과에 따라 보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호르무즈 파병은 위협 요인도 크다. 행여 이란의 미사일 혹은 드론 공격으로 우리 해군함이나 유조선이 피해를 입거나 교전이 발생한다면 전쟁에 끌려들어 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냉전-탈냉전 70년 동안 한국이 큰 수혜를 누린 한미동맹이 앞으로 30년간 안보와 번영을 위해 적절한 역할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올 1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한 말도 이런 동맹 조정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던진 말이었다. 시 주석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서 정확한 전략적 선택을 하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틀 뒤 “공자님 말씀으로 들었다”며 넘겼지만, 속으론 결코 가볍게 듣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시 주석의 말은 21세기 중반이면 중국은 미국과 대등한 동아시아 패권국이 될 것이니, 한미동맹 나아가 한미일 3국 협력에 목매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중국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주변국과의 관계 재정립으로 국가 운명의 방향을 튼 경험을 갖고 있다. 마오쩌둥 시절인 1960년대 공산 종주국 소련과 갈라섰고, 1970년대엔 아예 6·25 때 싸웠던 미국과 손잡았다. 그 결과 냉전이 끝났을 때 중국은 냉전의 승자 편에 섰다. 하지만 이걸 두고 우리가 운명을 중국과 함께할 수는 없다. 중국의 면면이 ‘역사의 올바른 편’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시 주석의 요구는 그럼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견국 한국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누구와 손잡고, 어떤 책무를 해야 하는 걸까. 트럼프 정책이 지닌 지독한 일방주의, 오락가락 관세정책에서 드러난 즉흥성과 무논리는 한국인을 실망시켰다. 그렇다고 한미동맹의 앞날을 트럼프 1인만으로 규정할 순 없다. 미국이 전통적으로 제공해 온 가치(자유와 인권)와 실리(미국 시장, 국제교역을 통한 부 축적, 동맹 안보)를 제쳐놓고 21세기 한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두 나라엔 극복할 신뢰 문제가 남아 있다. 미국이 정말 우리를 핵 공격한 나라를 핵으로 응징해 줄까. 미국을 향한 핵 보복을 감수하면서까지 핵우산을 씌워 줄까. 드골의 프랑스가 독자 핵 개발에 나섰을 때 가졌던 의문이 똑같이 남아 있다. 미국은 미국대로 대만 방어를 위해 주한미군 전력을 투입할 때 한국이 협력할지 선뜻 믿지 못하고 있다. 호르무즈 파병 요구는 결정적 순간에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을 줄 기회다. 한미동맹이 평상시엔 모범적이지만, 정작 중요한 유사시엔 결단을 주저하는 관계여선 곤란하다.트럼프가 쏘아 올린 파병 카드는 정부가 결정할 일이지만, 파병 논쟁에 정치인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는 이젠 우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우리끼리 공급망’이 짜인다는 걸 지난 1년간 숱하게 목격했다. 적어도 정치인 몇몇은 국가 운명을 이끌기 위해 당장은 민심의 호응이 적더라도 글로벌 책무를 해 나가자고 말할 때가 왔다. 국제 체제에서 이익은 내지만, 그 시스템을 지킬 책임을 회피하는 코리아는 점점 환영받기 어려워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파병 반대’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신중 검토 끝에 불참 결정을 정부가 내린다면 그 자체도 존중되어야 한다.언젠가는 한국도 전투병 파병을 여론이 수용할 때가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으로 호르무즈 파병 논쟁이 기억됐으면 한다. 반대가 더 많은 여론조사 숫자는 ‘무서운 고양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목에 국익 중심 파병 주장이라는 방울을 매달겠다고 나서는 소신파가 등장할 때가 됐다.
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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