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마음의 폐허에서 탄생한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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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칼럼] 마음의 폐허에서 탄생한 물방울

초가을 저녁 평온한 미술관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김창열(1929~2021)의 그림을 마주했습니다. 밤의 적막을 밝히는 빛처럼 환한 물방울 앞에서 고요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그 여운이 오래 남았던 탓일까요. 깊어가는 가을, 보슬비 내리던 어느 날 다시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그날 제가 마주한 건 영롱한 물방울 이면에 감춰진 ‘마음의 폐허’였습니다. 낡고 남루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외롭고 적막한 공간 말이지요. 그곳에는 타인에게 내보일 수 없는 절망과 고독이 스며 있는 듯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살갗의 따가움처럼 쓰립니다. 예술가의 내면 깊숙한 고통이 어떻게 맑은 물방울이 되었는지 그 서사를 헤아렸습니다.

1929년생인 김창열은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열여섯 살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그는 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을 배우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6·25 전쟁의 참혹한 상흔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였습니다. 스물한 살에 징집돼 중학교 동창 절반인 60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목격했고,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의 여파로 희생된 이들의 한스러운 현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혼란과 절망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의 청춘은 훗날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1953년 발표한 시 ‘동백꽃’에는 훗날 물방울로 이어질 슬픔의 미학이 예감돼 있습니다.

1965년 미국 뉴욕으로 향한 그는 앵포르멜(비정형) 회화에 심취했으나, 현지 화단은 차가웠고 생계와 고독이 예술혼을 조여왔습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고립과 좌절은 도약의 시작이 됩니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던 ‘구멍’의 형상은 점차 동그란 구체로 진화했습니다. 작가는 “내면의 뜨거운 응어리들이 냉각되어 공같이 흰 구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1969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마구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지내던 1971년 어느 새벽, 재사용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 위 물방울이 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작가는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끈적이는 점액질 형상은 투명한 물방울로 변했고, 202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줄기차게 물방울을 그려냈습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지 아름다운 이슬이 아니었습니다. 총알이 관통한 상처,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피와 점액의 흔적이자 고통의 기억이 응결된 형상이었습니다. 작가에게 물로써 고통의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제의이자, 애도의 일기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천자문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회귀’ 연작을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배운 천자문은 그에게 세상을 인식하는 언어였습니다. 영원히 남는 문자 위에 덧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 그것은 기억과 망각, 존재와 소멸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자 뿌리로의 회귀였습니다.

50년 동안 물방울을 그린다는 건 고통을 마주하고 아름다움으로 정화하는 기도이자 수행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한 번에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 무게는 매일 아침 가슴 위에 놓여 있습니다. 김창열 역시 어제 물방울을 완성했다고 해서 오늘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다시 붓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방울은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매일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시간이 결코 초라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조금씩 정화하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빛을 만들어낸다고 말입니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덧없는 순간 속에서도 영원처럼 반짝이며 오늘을 견디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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