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프랑스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대표작 ‘소매치기’(1960년)의 시작부예요. 놀랍게도 이 작품의 절반 이상은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의 소매치기 기술을 병적인 수준으로 묘사해요. 지하철에서 신문 읽는 체하며 코앞에 선 남자의 가슴팍에서 지갑을 꺼내고, 택시에 막 타려는 사람을 새치기하는 척하며 손을 뒤로 뻗어 뒷사람 안주머니에서 현금을 낚아채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며 손목시계를 끌러내는 각종 기술이 가치평가 없이 전시되지요. 주인공의 대사라고는 “매번 지하철 노선을 바꿈으로써 구역을 변화시켰다” “더 노력해야 한다” “심장이 떨리면 손이 떨리면서 손에 쥐고 있는 신문이 떨린다” 같은 독백이 대부분이며, 신문을 펼치고 접고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빼는 연습을 무한 반복하면서 거의 몸이 기억하는 수준으로 소매치기 기술을 연마하는 주인공의 일상이 그려져요.
이 영화는 소매치기 꿈나무들을 위한 가이드용 실전 영상이 아니에요. 놀랍게도 범죄가 성공을 거듭할수록 주인공의 얼굴에는 기묘한 절망이 잉크처럼 퍼지고, 마치 쾌감보단 죽음으로 치닫기 위해 소매치기에 몰입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급기야 주인공은 그토록 갈망(?)하던 실패에 다다르고, 차디찬 감옥 창살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획득하고 구원과 마주하지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영감을 받아 브레송이 만든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소매치기 행위는 구도(求道)의 죄스러운 과정처럼 다가와요. 브레송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마치 영혼 없는 목각인형처럼 다뤄져요. 오직 차가운 시선을 통해 인물의 심리보단 행동에 천착함으로써 외려 인간의 존재적 슬픔, 그리고 속죄와 구원을 향한 타는 갈망을 사무치게 드러내면서 브레송은 ‘행동주의’ 영화의 거장이 되었지요.하나의 절박한 목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적 행동의 반복, 이런 하루가 거듭되면서 더욱더 가까워지는 목표, 목표에 다가갈수록 역설적으로 짙어지는 좌절, 그리고 절망 속에서 기적처럼 움트는 구원…. 영화의 톤 앤드 매너는 완전 다르지만 이런 브레송의 작품을 이상하리만치 떠오르게 만드는 독창적인 미국 영화를 최근 보았어요. 요즘 미국 독립영화계 대표로 우뚝 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쇼잉 업’(올해 1월 국내 개봉)이죠.
놀랍게도 여기엔 클라이맥스가 없어요. 아니, 감정적 고조 자체가 집 나가 버린 영화랄 수 있죠. 꽤 재능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 가난한 여성 조각가 ‘리지’(미셸 윌리엄스 역)가 주인공이에요. 전시회가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녀의 일상은 하루하루 지뢰밭이죠. 반려묘 리키는 사료를 안 준다며 시도 때도 없이 야옹야옹 울어대며 작업을 방해하고, 세 든 집에선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샤워도 못 하죠. 게다가 집주인이자 동료 예술가인 동양계 ‘조’는 요란한 록음악을 들으면서 스펀지를 돌돌 말아 철사로 꽁꽁 묶고 미친 듯이 색칠을 턱턱 해대는데, 이게 또 요상하리만치 근사한 작품으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 리지는 열등감만 불타오르죠.
밤새 작업하다 일어나 보니 반려묘는 집 안에 들어온 비둘기의 날개를 뜯어 먹고 있고, 날개 다친 비둘기를 거금 150달러 주고 치료해 준 그녀에겐 상자에 담긴 비둘기가 완치될 때까지 ‘모시고’ 다녀야 하는 모진 일상이 추가되지요. 부스스한 머리에 퀭한 눈으로 어렵사리 만든 조소 작품을 가마공장으로 가져가는데, 가마 열이 높게 설정되는 바람에 작품은 검게 그을리고 가마공장 사장은 “그로테스크한 맛이 있다”면서 그녀의 신경을 긁어대요. 과연 그녀는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요? 이 영화엔 두 가지 주목할 디테일이 있어요. 배경음악이 없다는 점과 화면 비율이 가정용 평판 TV와 동일한 16 대 9란 점이죠. 주인공 리지를 예술가가 아닌 생활인의 관점으로 보여주겠단 의도가 드러나요. 부산스러워서 탁월한 이 영화는 웅변하죠.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 너절한 일상에서도 예술 의지를 잃지 않는 태도가 진짜 예술이라고요.예술가의 삶은 예술적이지 않아요. 우리 삶도 영화 같지 않지요. 서사도 없고 클라이맥스도 없고 극적인 성공도 승리도 반전도 없으니까요.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는 말했어요.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만이 남는다.” 하루하루 소처럼 반복하는 우리의 무간지옥 같은 일상이, 알고 보면 가장 대단한 예술입니다.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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