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고환율은 구조개혁 미룬 외상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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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을 확정 지은 지난해 11월 이후 주요 48개국 가운데 실질실효환율이 떨어진 나라는 12개국. 이 가운데 통화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붕괴한 아르헨티나(-14%)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낙폭이 가장 컸다.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작년 10월 말 93.68에서 올해 10월 말 89.09로 4.9% 하락했다. 명목환율에 물가 차이와 교역 구조를 반영해서 구하는 실질실효환율은 한 나라 통화의 대외 구매력과 가격 경쟁력을 나타낸다.

일본 못지않은 통화가치 하락

[차장 칼럼] 고환율은 구조개혁 미룬 외상값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하락률은 1.2%에 그쳤지만, 실질실효환율의 극적인 하락을 얘기하려면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실질적 통화가치는 1995년 194로 정점을 찍은 후 10월 말 70.41로 64% 폭락했다. 선진국 가운데 통화의 대외 구매력이 이 정도로 떨어진 나라는 일본뿐이다.

실질실효환율이 폭락한 일본에서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난해진 자신과 마주했다. 코로나19가 수습되면서 고대하던 해외여행에 나선 일본인들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년여 만에 하와이의 핫도그값이 엔화 기준으로 2.5배 뛴 건 푸념 축에도 못 끼었다. 동남아시아 관광지조차 마음먹어야 갈 수 있을 정도로 엔화 가치가 떨어져 있었다.

해외여행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질실효환율이 하락했다는 건 자국 통화로 해외의 에너지와 식량을 사들이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치솟은 수입 물가가 시차를 두고 국내 소비자물가에 속속 반영되면서 필수 소비재 지출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부터 삶의 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실질실효환율도 2006년 12월 말 124.1의 정점으로부터 35% 급락했다. 실질 통화가치 하락으로 일본인이 받은 충격을 최근 우리도 경험하는 이유다.

한때 인기 휴양지였던 괌을 찾는 관광객이 끊어지면서 이 지역을 오가는 항공편은 ‘눕코노미’가 됐다. 이코노미석에서 누워서 갈 수 있을 정도로 텅 비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괌의 인기가 뚝 떨어진 건 지역 관광시설 낙후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율 여파로 가격이 비싸진 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 스테이크 레스토랑의 가격이 칼질하기 손이 떨릴 정도로 비싸졌다거나 비용 부담 때문에 유럽 여행을 동남아 여행으로 바꿨다는 사연도 드물지 않다.

올 3분기 1%대에서 움직이던 소비자물가지수는 11월 2.4%까지 올랐다. 국제 유가는 내렸는데 환율이 뛰면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크게 올랐고, 망고 키위 등 수입에 의존하는 과일 가격도 급등한 영향이다.

구조개혁 외면시 시장 신뢰 잃어

환율은 다양한 요인에 따라 움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력을 반영한다. 일본은 엔화의 실질 통화가치 추락을 ‘잃어버린 30년’의 외상값이라고 해석한다.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정확장·통화팽창 정책을 오랜 기간 고수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다.

원화 가치 급락과 기록적인 실질실효환율 하락 역시 노동·연금·산업 구조조정 등 각 분야의 필수 구조개혁을 미룬 외상값을 치르라는 신호다. 이번에도 정치적 이해득실 때문에 구조개혁은 외면하고 돈 풀기로 표심만 얻으려 한다면 한국은 시장 신뢰 상실이라는 더 혹독한 현실을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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