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벤처의 심장은 맥이 약해졌습니다. 창업가의 열망이 약하거나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길이 막혀서입니다. 데이터는 갇히고 규제는 벽이 됐습니다.”
2일 국내 벤처의 요람인 서울 테헤란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 벤처 30주년’ 기념식엔 그리운 얼굴이 등장했다. 국내 1세대 벤처인 메디슨 창업자로 30년 전 벤처기업협회 창설을 주도한 고(故)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이었다. ‘벤처업계의 대부’로 불린 그는 201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한 이 회장의 축사엔 생전 그의 철학과 벤처인들의 열망이 담겼다. 그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며 “규제는 안전망이어야지 담장이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축제의 날 벤처인들이 이 회장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호소였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정부는 ‘규제 개혁’을 외쳐왔다. ‘금지된 것 외에 모두 허용한다’는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은 2004년 총선에서 옛 새천년민주당의 공약이었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네거티브로 규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네거티브 규제는 20년 넘게 정치적 구호로 반복됐지만 바뀐 건 없다. 벤처 30주년 기념식이 열린 날 비대면 진료 플랫폼의 의약품 도매업 겸업을 금지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부쳐졌다. 비대면 진료 스타트업 닥터나우가 ‘약국 뺑뺑이’의 대안으로 앱을 통해 약국의 처방약 조제 가능 여부를 안내한 것에 대해 의약업계가 플랫폼의 신종 시장 장악 시도라고 반발하자 당정은 의약업계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2020년 국회가 승차공유 서비스 타다를 사실상 불법화하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과 판박이다. 우버 등 글로벌 승차공유 서비스가 무인택시 실험까지 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혁신의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그사이 벤처의 맥박은 약해지고 있다. 2013년 193조원이던 벤처기업 총매출은 2023년 242조원으로 25%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 증가율(53%)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30년간 13만6000개의 벤처기업이 탄생했지만 대기업으로 성장한 곳은 11개에 불과하다.
이날 영상 속에서 이 회장은 “돈이 아니라 꿈으로 경쟁하고,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자는 게 벤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 벤처 정신을 키우기 위해 이재명 정부도 유니콘 기업 육성에 13조5000억원을 투자하고 모태펀드 예산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 논리에 휘둘려 ‘일단 막고’ 보는 규제가 바뀌지 않는다면 10년 뒤에도 이 회장이 말한 ‘불편한 진실’은 반복될 것이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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