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좋은 돈, 나쁜 돈

1 week ago 5

[토요칼럼] 좋은 돈, 나쁜 돈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글이다. 요즘 대한민국에 불행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서민은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25만원씩 받아서 좋고, 주식에 투자한 사람은 주가가 올라서 좋고, 집을 가진 사람, 그중에서도 서울 요지에 아파트를 보유한 사람은 집값이 뛰어서 좋다는 내용이었다.

다소 반어법적 뉘앙스를 풍기는 이 얘기를 동료들에게 했더니 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누구는 2차 소비쿠폰을 못 받았다고 했고, 누구는 주식을 얼마나 가졌는지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이른바 서울 상급지 아파트를 보유한 사람도 그 자리에는 없었다.

[토요칼럼] 좋은 돈, 나쁜 돈

분위기는 바로 썰렁해졌다. 2차 소비쿠폰 10만원이 큰돈은 아니라고 해도 남들 다 받는 돈을 못 받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코스피지수가 1년도 안 되는 사이 60% 넘게 올랐지만 NH투자증권이 자사 고객을 분석해보니 손실을 보는 사람이 이익을 내고 있는 사람보다 많았다고 한다. 집값 흐름은 지역에 따라 크게 갈리고, 사는 집 한 채 가격이 올랐다면 세금만 더 낼 뿐 당장 차익을 실현할 것도 아니다. 주식도 집도 없는 사람은 ‘벼락거지’가 됐다는 속쓰림을 견뎌야 한다.

소비쿠폰, 주가 상승, 집값 상승은 한 가지 배경을 공유한다. 막대하게 풀린 돈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광의통화(M2)는 4447조원으로 작년 말보다 6.9% 늘었다. 코로나19발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연 0.5%까지 내린 2021년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세다. 내년 정부 예산은 728조원으로 올해보다 8.1% 늘어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4%에 이른다.

무엇이든 흔해지면 가치가 떨어진다. 돈이 많아진 만큼 돈값은 하락한다. 즉, 물가가 오른다. 소비쿠폰을 3차, 4차까지 받는다 해도 공돈처럼 느껴지는 달콤함은 한때뿐이고, 풀린 돈이 끌어올린 물가는 디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리지 않는다.

자산 가격 상승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경제 펀더멘털과 정책 변수가 있지만 큰 틀에서 주가와 집값은 돈이 풀린 만큼 오른다. 2020년 12월 말부터 올해 9월 말까지 M2가 43.5% 증가하는 동안 코스피 시가총액은 39.0% 늘고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37.7% 상승했다. 묘한 우연 같지만 사실은 필연이다.

풀린 돈의 나비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넘치는 돈은 자산 시장에 머물 뿐 생산적인 곳으로는 좀체 가지 않는다. 코스피가 4000을 넘나들고 강남 집값이 신고가를 경신하는 와중에 20~30대 ‘쉬었음’ 인구는 역대 최다다.

미래가 불투명해진 청년은 주식부터 코인까지 자산 투자에 몰두한다. 자산 투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다. 돈을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현대 신용 화폐 시스템에서 돈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원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청년이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국가가 화폐를 다뤄온 역사는 끝없는 기만과 사기의 역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독일 경제학자 필리프 바구스와 안드레아스 마르크바르트는 저서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에서 화폐를 ‘좋은 돈’과 ‘나쁜 돈’으로 구분했다. 좋은 돈은 통화량이 급격히 늘어나지 않고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돈, 나쁜 돈은 통화량이 불어나 가치가 하락하는 돈이다. 나쁜 돈은 성실하게 일하며 근검절약하는 평범한 사람의 구매력을 갉아먹는다. 하루라도 빨리 최대한의 대출을 받아 뭐라도 사두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전 국민이 돈을 나눠 받고 주가와 집값은 오르는데 격차는 커지고 반목은 깊어지는 역설이 벌어진다. 그 씨앗이 나쁜 돈이다.

돌이켜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주식 투자에 뛰어든 것이 불과 몇 년 사이 일이다. 10년 전, 20년 전이라고 해서 집값이 아주 싼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 아파트 가격, 심지어 강남 집값도 지금처럼 ‘넘사벽’은 아니었다. 다급하게 영끌하지 않아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었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지켜주리라는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심히 살다보면 부자는 못 돼도 가정을 꾸릴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다고 기대했던 시절,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본분에 충실한 삶 자체를 미덕으로 치던 시대, 좋은 돈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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