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하고 선택을 설계하는 ‘기획노동’ 혁신 외치는 리더와 실행하는 실무자 그 사이 잇는 보이지 않는 판단과 조정 제대로 된 기획노동이 일상을 지킨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대학 행정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대학이 숭고한 교육과 첨단 연구로만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학기가 시작되려면 누군가 수천 개 강좌의 강의실을 배정하고, 장학금 지급 일정과 등록금 납부 기한이 어긋나지 않도록 맞춰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새 단과대 설립은 회의록 한 페이지로 남지만, 그것이 실제 건물과 교수진, 교육과정으로 구현되기까지는 수십 명이 몇 년을 매달려 없던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교수로 20여 년을 지내며 그 일들이 그냥 ‘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김희경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최근 저서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에서 이런 노동에 ‘기획노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냉장고 속 재료를 헤아려 이번 주 식단을 정하고, 아이의 학원을 알아보고, 부모의 간병인을 바꿔야 할지 판단하는 일. 요리와 청소처럼 손에 잡히는 노동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예측하고 결정하고 점검하는 정신적 노동이다. 회사에서는 ‘기획’이라 불리는 일이 가정에서는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대개 여성 한 사람의 머릿속에 쌓이고, 그 가치는 추산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이 기획노동은 두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집안이 무사히 돌아가게 하는 유지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앞날과 부모의 노년을 설계하는 창조의 얼굴이다. 기획은 지키는 일이면서 동시에 만드는 일이다. 조직과 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결정’이 무언가를 만든다고 믿지만, 결정만으로 없던 것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 이름은 결정과 실행 사이에서 누가 무엇을 챙길지 고민하는 이름 없는 노동을 통해서만 실물이 된다. 6·3 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전형적인 기획의 실패다. 투표용지를 얼마나 인쇄해 어디에 배분하며, 부족할 때 어떻게 공급할지 챙기는 일은 잘될 때는 좀처럼 성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적인 준비와 대응이 어긋나자 선거제도 전체의 신뢰가 흔들렸다. 기존 절차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달라진 제도와 환경에 대응할 수 없었다. 유지를 위해서도 새로운 기획이 필요했던 셈이다. 우리가 ‘제도의 신뢰’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무명의 판단과 점검이 쌓여 있다. 교육정책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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