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미끄러운 비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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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미끄러운 비탈에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여러모로 어려운 국제 행사였다. 작년 겨울부터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끝내 정권이 바뀌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국정을 맡은 현 정권으로선 APEC 정상회의에 관심을 쏟기 어려웠고, 준비가 덜 된 채 행사를 치르는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게다가 미국과 중국이 거세게 부딪치는 터라 파국의 가능성이 그늘을 드리웠다.

다행히 행사는 탈 없이 진행됐다. 김해공항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은 원만히 끝나 온 세계가 안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매끄럽게 치러 그의 외교 일정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잘 넘겼다. 국민의 판단도 같은 듯하니, 잇달아 나온 의혹과 실책들에도 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행사의 백미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왔다. 첫머리 발언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추진 잠수함 연료의 공급을 요청했다. 핵추진 잠수함은 북한이나 중국 쪽 잠수함을 추적하는 활동에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만일 이 발언의 상대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중국 반응은 거칠었을 터다. 실제로는 중국의 반응은 원론적이었다.

비슷한 장면이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나왔다. 회담이 끝나고 선물을 교환할 때 시 주석의 선물 중에는 샤오미 휴대전화가 있었다. 이 대통령은 웃으면서 “통신 보안은 어떤가요?” 하고 둘러선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웃음이 터졌고, 시 주석도 따라 웃으며 “혹시 백도어가 있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받았다. 중국 제품은 거의 예외 없이 정보가 유출되는 백도어를 갖춰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된 터라 이 대통령의 농담은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농담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분위기를 가볍게 했다.

국력이 비대칭이면 강대국은 지배적 정책을 고르고 약소국은 묵종적 정책을 고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두 나라의 관계는 미끄러운 비탈과 같다. 한번 미끄러지면 약소국이 비탈을 되올라가기는 어렵다. 당연히, 중국과의 관계에선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 긴요하다.

이 점에서 치명적 실책은 박근혜 정권에서 나왔다. 남중국해 분쟁에서 중국의 국제법 위반을 필리핀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소했을 때 우리는 6·25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필리핀을 외면했다. 패소를 예상한 중국이 PCA 판결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미국은 ‘당사국들이 PCA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기로 하고서 한국에 동참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은 거절했다. 중국이 실제로 판결에 불복하자 미국과 일본은 중국의 태도를 비판했다. 한국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권의 비겁한 태도는 당연히 중국의 경멸을 샀다. 한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자 중국은 시비를 걸면서 보복했다.

몇 해 전부터 중국은 황해의 잠정조치 수역에 괴상한 구조물들을 설치해 운용한다. 한국 경비정이 다가가면 중국 함정들이 막아선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로선 미국과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남중국해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린 터라 도움을 요청하기도 힘들다.

문재인 정권은 중국에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굴욕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중국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받은 모욕적 대우는 중국의 실체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과서가 됐다. 윤석열 정권에서 한국과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사이버전과 우주전으로 넓히면서 비로소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끄러지기를 멈췄다. 이제 이 대통령이 보인 뚝심으로 미끄러운 비탈에서 한 걸음 올라선 셈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개인기’만으로 미끄러운 비탈에서 버틸 수는 없다. 점점 강대해지는 중국에 지혜롭게 대응하려면 전략과 정책의 차원에서 분발해야 한다. 일각에서 지금 여당은 중국을 특별히 우대하는 정책들을 추진한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이번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삼아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행태를 바꾸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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