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은주]‘다름’이 아닌 ‘틀림’의 문제

1 week ago 5

‘진실성’ 대화 규칙 무시가 부른 불통 사회
AI 환각엔 호들갑, 정치인-유튜버엔 관대
의도 무관 허위정보는 부정적 ‘잔향’ 남겨
사전 팩트체킹이 지속가능한 사회의 기본

이은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은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몇 년 전 자신을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라고 소개하는 드라마 속 변호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생으로 등장한 변호사는 화가 나 있는 상사에게조차 ‘사법’이 아니라 ‘사뻡’이라고 틀린 발음을 바로잡는다. 회의 자료의 오탈자나 잘못된 수치를 즉시 고치지 않으면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나로서는 이 장면이 자못 반가웠다.

언어철학자 허버트 폴 그라이스는 사람들이 대화할 때 암묵적으로 따르는 규칙을 네 가지로 제시했다. 정보의 양, 질, 관련성, 표현 방식이다. 첫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상대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말한다. 두 가지를 물었는데 하나만 답한다거나 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장황하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둘째, 본인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참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지어낸 거짓말은 물론이거니와 잘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단언하는 것 역시 규칙 위반이다. 셋째, 발언 내용이 지금 대화의 흐름과 연관된 것이어야 한다. 즉, 자다가 봉창 두드리거나 동문서답을 하면 안 된다. 넷째,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명료하고 논리정연하게 전달한다. 모호한 표현을 피하고 질서 있게 정리해서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 한다.

얼핏 상식적으로 들리지만, 대화 참여자들이 이러한 규약을 따를 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비로소 말이 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 사회의 불통은 이러한 대화의 기본 규약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최근 특히 심각한 것은 정보의 질, 즉 진실성 규칙의 위반이다. 인공지능(AI)이 부정확한 정보나 멋대로 만들어 낸 허구의 사실을 제공하면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환각 현상)’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유력 정치인이나 두터운 팬덤을 자랑하는 유튜버가 사실이 아닌 정보를 퍼뜨리는 것에는 지나치게 관대한 경향이 있다.

의도적으로 거짓을 유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더라도 부정확한 정보는 공론장을 어지럽힌다. 2015년 국제학술지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실린 한 논문은 허위 정보가 교정된 뒤에도 잔향 효과를 남긴다는 결과를 보고하면서 이를 ‘신념의 메아리(belief echo)’라고 명명했다. 예컨대 특정 정치인이 범죄자로부터 후원금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여준 뒤, 정정 기사를 통해 그 후원자가 사실은 범죄자와 그저 이름이 비슷한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알려줬다. 정정 기사를 본 사람들은 해당 정치인이 범죄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애초에 잘못된 기사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에 비해 여전히 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즉, 머리로는 결백하다는 것을 알아도, 한번 생긴 부정적 인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최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들에 대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들이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일단 메시지를 던진 뒤,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사과문을 발표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마치 법정에서 노련한 변호사가 재판장의 제재를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질문을 던져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전략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미 들어버린 내용을 못 들은 걸로 되돌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정파적 이익을 위해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허위 정보를 고의로 흘리는 것이 아니라면, 팩트체킹은 사후가 아니라 발화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틀릴 수 있고, 기억이 왜곡되거나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에 앞서 사실관계를 꼼꼼히 따져봐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성 규약을 준수하는 것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수용하는 메타인지, 새로운 정보를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는 지적 겸손과 직결된다.

두 명의 여종이 싸운 뒤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우길 때, 황희 정승은 둘 모두에게 “네 말이 옳다”고 했다. 잘잘못은 종합적인 판단의 영역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누가 ‘선빵’을 날렸는지 사실관계는 확인해야 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한 판단이야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이 과정에서 법무부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검찰 수사에서 강압은 없었는지, 대장동 업자는 정말 프리미어리그 구단주급 부자가 되는 건지 철저하게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 한스 로슬링이 강조한 ‘사실 기반 사고(팩트풀니스)’는 그저 개인에게 요구되는 시민적 자질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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