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신협약 이후 사법 주권 붕괴… 일제, 도성 밖에 근대식 감옥 신축
독립운동 잇달아 수감자 수 급증… 지속적 증축으로 대규모 시설 돼
사상범 독방 수용해 의지 억눌러… 주변에 옥바라지 마을까지 생겨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벌 제도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육체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 중심에서 근대 이후 구금을 통해 자유를 제약하는 ‘자유형’ 중심으로 변화했다. 19세기 말 조선도 형벌 제도의 근대화를 위해 서양식 감옥 건립을 모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런 중에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 이른바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처음 신축했을 때 서대문형무소의 규모는 전체 4800여 평, 수감 정원은 500명이었다. 그런데 이미 1908년 수감자가 835명에 달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빈발해 체포·수감된 인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병합 이후에도 수감자는 점점 증가해 1915년에는 벌써 정원의 세 배가 넘는 1686명에 이르렀다. 3·1운동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기는 했지만 1919년에는 무려 3000명 이상이 수감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형무소를 지속적으로 증축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전체 규모 1만6500여 평, 수감 정원은 2500명에 이르렀다.
형무소의 존재는 단지 그 자체로 그치지 않았다. 주변의 도시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대문형무소 주변에는 이른바 ‘옥바라지 마을’이 형성됐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당시 법령에 따르면 미결수는 양식이나 의류, 침구 등을 ‘자변(自辨·자기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올라온 미결수의 가족이 형무소 주변에 오래 머무는 경우가 생겼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이나 밥집 등이 늘어나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이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赤道)’에는 형무소 주변의 옥바라지 마을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붓고 쫓기는 대경성은 예까지 밀려나왔다. 건너 산 밑까지 올망졸망 초가집이 들어붙었다. 큰길이 생기고 버스가 다니고 나날이 번창해 가건마는 암만해도 감옥 냄새는 빠지지 않는다. 독립문을 지나서부터 형무소 초입까지 형무소 사식 차입소, 감옥밥 파는 집, 형무소 피고인 차입소, 변당 차입소 간판들이 지붕을 디디고 선 것만 보아도 어쩐지 으스스해진다.”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한 서대문구 현저동과 길 건너편 종로구 무악동 일대의 지목은 병합 초기에는 대부분 ‘전(田)’이었으나, 점차 ‘대(垈·대지)’ 비율이 높아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나 갑자기 미결수가 많아지면 옥바라지 마을도 덩달아 북적거렸다. 3·1운동 당시의 보도를 보면 “서대문 감옥 재감자 수는 그 감옥이 시작된 뒤로 처음 보는 기록이라. 그중에서 1625인은 이번 소요 사건에 관한 미결수들”인데, “죄인이 이와 같이 일시에 늘어난 까닭으로 먹는 것이 일시에 늘어서 지금은 하루에 17섬의 곡식을 먹어버리”고, “이에 또 차입밥을 먹는 사람이 적지 아니”하여 “차입밥을 먹는 사람은 대략 600명인즉 세 끼로 말하면 2800끼의 많은 벤또가 매일 감옥으로 들어오는 터라 끼니 때가 되면 벤또가 산같이 쌓”였다고 전한다(매일신보, 1919년 5월 15일).기본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 이상의 옥바라지도 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학생들이 수감된 학교의 교사 중에는 “각기 자기가 맡은 과정의 교과서와 교과 보충 인쇄물 등을 차입시켜 옥중에서 상학을 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동아일보, 1926년 6월 23일).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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