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만추’
가을이 깊어 이제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만추’다. 이만희 감독의 전설로 남은 이 작품은 여러 차례 리메이크됐지만 내게 각별하게 남은 건 김태용 감독의 최신 버전이다. 배경을 미국 시애틀로 옮겼지만, 살인죄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애나(탕웨이 분)가 어머니의 부고로 장례식에 가기 위해 3일간의 휴가를 나왔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훈(현빈 분)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기본 서사는 그대로다. 김 감독은 축축한 안개를 품은 쓸쓸한 시애틀을 배경으로 짧지만 강렬하고 잔잔하지만 폭풍 같은 사랑과 위로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늦가을을 뜻하는 ‘만추’라는 제목에서 풍기듯,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3일 후면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할 애나와 누군가에게 쫓겨 붙잡힐 위기에 몰린 훈은 시간의 절박함이 남다르다. 과거의 사건으로 애나는 자유로운 시간을 빼앗겼고, 사랑이 필요한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훈은 자신의 시간을 팔며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이 3일은 진짜 자신들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짧지만 어쩌면 평생의 기억이 될 시간들로.김 감독은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걸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와의 매 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이들의 짦은 만남과 이별에 담긴다. 늦가을은 이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다. 활활 타오르다 순식간에 떨어져 버리는 늦가을의 순간들은 짧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색으로 물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만날까요? 나오는 날에.” 사랑을 알게 된 순간 이별을 맞이하게 된 훈이 애나에게 남긴 그 말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럼에도 다시 만나고픈 시간에 대한 희망이 담긴다.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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