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삶을 다시 세우는 ‘유언 에세이’ 쓰기[기고/유성호]

1 week ago 4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올해 1학기 서울대 교양수업 ‘죽음의 과학적 이해’ 강의에서 특별한 글쓰기 과제를 냈다. “당신이 93세에 세상을 떠난다고 가정하고, 마지막 순간의 자신이 지금의 나에게 편지를 쓰듯 유언 에세이를 작성하라.” 평범한 과제처럼 보이지만, 학기 말 한 학생이 “살면서 처음으로 삶을 깊게 들여다보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과제를 검토한 조교들 역시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다”고 말했다. 죽음을 상상하는 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음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지금의 삶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언 에세이는 법적 문서로서의 유언장과 다르다. 재산을 어떻게 나누고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 지침을 남기는 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자신에게 묻는 글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상상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은 곧 자기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과제를 통해 학생들에게 가장 바라고 싶었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누구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은지, 어떤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지, 무엇이 진짜로 내 삶을 지탱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왜 93세일까. 나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충분히 먼 미래의 죽음을 설정해야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을 정해 두자 남은 시간이 선명해지고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 학생은 “93세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의 삶을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었다.

유언 에세이는 결국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다. 우리는 바쁜 오늘에 쫓겨 중요한 감정과 관계를 뒤로 미룬다. 언젠가 말하겠다고, 해보겠다고 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언 에세이는 바로 그 ‘언젠가’를 눈앞으로 가져오는 글쓰기다.

마지막 순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넬 조언은 늘 비슷하다. “사랑한다고 말하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말라. 미뤄둔 화해는 더 늦기 전에 하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지금 시작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먼 훗날 마지막이 다가온다고 상상하며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첫째,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감사했던 순간은 무엇일까. 둘째,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셋째, 돌아봤을 때 ‘내 삶은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직함도, 성취도, 재산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오래 미뤄뒀던 말, 마음속에만 간직한 꿈과 그것을 향해 노력했던 자신이 자리한다. 그래서 유언 에세이는 죽음을 준비하는 글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더 충만하게 살기 위한 지침이 된다.

‘93세의 나’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늘 따뜻하면서도 엄격하다. 그 시선 앞에서 우리는 오늘을 더 진심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오늘 단 한 장의 유언 에세이를 써보시길 권한다. 마지막을 미리 써보는 일은 역설적으로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연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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