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日·中 갈등이 남의 얘기가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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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 칼럼] 日·中 갈등이 남의 얘기가 아닌 이유

중국 국가부주석을 지낸 왕치산이 부총리 시절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한 행사장에서 나눈 대화다. “전에는 장관이 내 선생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선생 자리에 있는 것 같소. 미국 시스템을 보시오. 우리가 당신들한테 더 이상 뭘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네.”

왕치산이 폴슨의 얼굴을 뻘겋게 만든 이런 말을 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다. 금융위기는 중국 공산당에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역사적 전기였다. 영원할 것 같던 미국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덩샤오핑 이후 도광양회의 위장술을 벗어던지고 패권 야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국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남중국해 영유권을 국제 사회에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게 2009년이다. 이듬해인 2010년 9월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직전인 2010년 2분기, 중국이 분기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말이 충돌이지 중국 어선이 일본 해경 순시선을 의도적으로 들이박은 도발 행위다. 일본은 중국인 선원 전원을 체포해 일본으로 송환했으나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17일 만에 전원 무조건 석방하는 수모를 당했다.

중국이 국제 분쟁 때마다 꺼내는 명분이 ‘국가핵심이익’이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국가 생존권 문제다. 주권, 영토완정(領土完整), 안보, 국민 생명, 변경 이슈 등을 망라한다. 특히 영토완정은 실효 지배 여부를 넘어 자의적 역사를 들이대며 단 한 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비타협성으로 주변국과 갈등을 확산시키고 있다.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이 ‘한일령(限日令)’의 근거로 제시하는 게 국가핵심이익 침해다. 대만 유사시 개입하겠다는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발언이 핵심이익을 심대하게 건드렸다는 것이다. 중국의 자신감이 강해질수록 공세 수위는 더 거칠어진다. 관광 제한, 영화 상영 중지 등은 물론 공연 중인 가수를 내쫓을 정도로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졸렬함까지 보였다. 중국이 국가핵심이익의 선을 넘어섰다고 대폭발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카이치의 발언도 핵심이익 사수에 충실한 것이다. 중국이 대만을 복속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일본 규슈에서부터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제1도련선의 붕괴로 일본 안보에 중차대한 위협이 발생한다.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장악하고 해상 수송로를 봉쇄하는 일은 일본으로선 좌시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다.

현재 중·일 갈등은 실제 사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발언으로 촉발된 것이고, 일어날 법한 일을 가정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실제로 국가핵심이익의 중대한 침해를 당하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는 일이 있다. 서해공정이다. 중국이 서해 내해화 작업으로 벌이고 있는 서해공정은 중국의 전형적 수법과 매우 닮아 있다. 처음엔 군사적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저강도의 비군사적 방법을 쓰다가 차츰 군사적 목표로 전환해가는 ‘회색지대전술’이다. 중국이 남중국해 분쟁에서 어민과 군인의 중간으로 준해군 격인 해양민병대를 활용하는 게 대표적이다. 중국은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 설치한 2기의 인공구조물을 연어양식장으로 주장하면서도 우리 측 접근을 강력히 차단하고 있다.

영토 분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무력 충돌과 보복을 두려워해 타협하고 묵인하는 일이다. 특히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판 없이 서 있는’ 것 같은 약소국으로선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리게 된다. 영토 보존을 위해선 확고한 ‘레드라인’ ‘마지노선’ 설정과 함께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키겠다는 결기가 필수적이다. 베트남이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대등한 규모의 인공섬을 조성해도 중국이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베트남의 저항력을 의식해서다. 베트남은 과거 중국과 해상 영토 분쟁에서 두 차례 교전을 불사해 150명가량의 해군을 잃었다. 베트남 국민들의 분노 표시로 베트남 내 중국 공장 15곳이 불탄 적도 있다. 반면 필리핀의 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대중 유화책을 쓴다고 해양 전초기지 격인 폐군함의 시설 보수를 하지 않겠다는 밀약을 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저질렀다. 서행공정은 영토 수호를 향한 우리 의지의 중대한 시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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