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내가 읽고 싶은 사용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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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내가 읽고 싶은 사용 설명서

친구인 김은지 시인은 요즘 만날 때마다 과학 얘기만 한다. 마감을 위해 노트북을 챙겨 성수동에 있는 책방 ‘오케이어맨션’까지 가는 길에도 자신이 새로 알게 된 과학 지식을 늘어놓았다. 나는 대학 시절 학원에서 과학 선생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거의 모든 얘기가 과학 지식으로 귀결되는 대화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과학 얘기 금지야.”

그랬더니 아예 말을 못 한다. 한참 침묵하던 김은지 시인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너 제품 사용 설명서 읽어?”

“난 그냥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대부분이 너처럼 제품 사용 설명서를 안 읽는대.”

“안 읽을 걸 왜 만드는 거야?”

“제품 사용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조사는 제품 사용법을 설명서에 다 써뒀다고 말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이해가 쏙 갔다.

“그리고 이건 과학 얘기가 아니라 문학 얘기야.”

이그노벨상은 노벨상을 패러디해 만든 상인데, 바보 같으면서도 반드시 시사하는 바가 있는 연구에 수여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설명서를 안 읽는 이유에 관한 연구는 바로 이 이그노벨상 중에서도 문학상을 받았다. 과학 얘기를 교묘히 빠져나가는 친구의 집념에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 5년 전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외장하드 하나 새로 샀다가 십여 년 동안 모아온 나의 습작을 몽땅 날려버린 일이다.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그리됐다. 마지막 키를 누르기 전에 나를 찾아온 불길한 예감을 믿어야 했는데…. 노트북 화면이 꺼졌다가 켜지더니 모든 파일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제야 제품 사용 설명서를 찾아 읽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제품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제품은 마지막 순간에 인간에게 묻는다. “YES or NO” 그게 제품이 우리에게 주는 냉정하고도 유일한 기회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따뜻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 인간은 실수할 수 있는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까지 덤으로 얻은 존재가 아닐까. 설명서 없이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몸소 겪는 일이 눈물겹다. 책방의 환한 창가 자리에 앉아 설명서를 소설처럼 쓰면 어떤가 생각했다. 단편소설 분량으로 작성된 사용 설명서를 읽고 나면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제품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알게 되지 않을까?

소설처럼 설명서를 재미있게 읽을 수만 있다면, 고장 신고가 줄어듦은 물론이요, 언젠가 친구들을 만나 새로 나온 냉장고 사용 설명서의 주인공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용 설명서를 읽기 위해 특정 제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니까.

오랜만에 들여다본 휴대폰 속 사진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지나온 길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지는 거라고 했는데.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소화가 안 되고, 두통이 심해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보니, 나더러 화병이란다.

“저는 화가 잘 안 나는데요?”

이렇게 또 나는 내 안의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간다. 침을 맞고 두통이 잦아들었다. 오랜만에 맑고 깨끗해진 세상을 걸어본다. 나뭇잎들이 저마다 빛을 가지고 놀고 있다. 나무는 죽음마저 색으로 만드는 마술사 같다. 매미울음이 끊기면 그때부터 나무는 물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멈춤의 힘으로 나이테를 만드는 것이다. 나도 뭐든 조바심 내지 않고 멈춰서 나만의 나이테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 내가 나를 사용하는 방법이 적힌 설명서 하나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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