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제2의 젠슨 황이 한국서 나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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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제2의 젠슨 황이 한국서 나오려면

한국에서 이렇게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해외 기업인이 언제 또 있었을까.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테크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 수없이 한국을 찾았지만, 다들 필요한 사람만 만나고 조용히 떠났다.

열흘 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방한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달랐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한국 국민들을 기쁘게 할 선물을 들고 간다”고 분위기를 띄우더니, 없어서 못 판다는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개를 풀겠다고 약속했다. 세계적인 기업인들의 만남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 치킨집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초청하는가 하면, 유튜버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주변 시민들에게 치킨과 바나나맛 우유를 돌리기도 했다. ‘록스타’라는 별명대로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삐딱한 눈으로 돌이켜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GPU부터 그렇다. 황 CEO는 “선물”이라고 했지만, 공짜는커녕 할인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다른 데보다 먼저 준다는 걸 선물로 포장했는데도 제값 다 주고 사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만에 세워준 연구개발(R&D)센터 같은 ‘진짜 선물’은 없었는데도.

‘치킨 회동’도 불편했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국 대표 기업인들을 들러리로 세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황 CEO는 치킨을 나눠주기 위해 이 회장과 정 회장을 앉혀놓은 채 수시로 자리를 비웠고, 치킨 회동을 끝낸 뒤엔 두 사람을 엔비디아 내부 행사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통상 ‘셀러는 을, 바이어는 갑’이지만, 이날 유튜브로 생중계된 이들의 관계는 정반대로 보였다.

한 기업인은 이를 두고 “인공지능(AI) 시장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했다. 세상 모든 기업이 미래를 건 AI는 엔비디아의 GPU 없이는 구현할 수 없다. 공급은 한정됐는데 다들 사겠다고 줄을 서니, 순서대로 기다렸다간 속도가 생명인 AI 전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황 CEO가 약속한 ‘우선 배정’이 선물이 된 이유다.

30년 전 그래픽카드를 팔기 위해 용산전자상가를 들락거리던 보잘것없는 스타트업이자, 15년 전 내놓은 GPU ‘페르미’가 발열을 잡지 못해 “음식을 데우는 용도로 딱 맞다”는 비아냥을 듣던 실패투성이 기업은 이제 삼성전자와 현대차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 10배 많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기업(시총 약 7095조원)이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엔비디아의 33년 역사를 다룬 책 <엔비디아 레볼루션>은 그 이유로 남다른 업무 방식과 확실한 보상을 꼽는다. CEO가 직원들과 직접 소통하는 열린 커뮤니케이션, 사람이 아니라 ‘미션’을 따르도록 하는 조직 문화, 전체의 4분의 3을 R&D 인력으로 채운 엔지니어 중심 시스템, 주 80시간 근무가 일상인 하드워킹, 성과를 낸 직원에게 엔비디아 주식을 수백주씩 건네는 파격 보상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메타, 알파벳, 테슬라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불과 한 세대 만에 세계 최강 기업이 됐다.

우리는 어떤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표 기업도, 주력 업종도 그대로다. 수재들이 창업보다 의대나 대기업 같은 ‘안정’만 택하니 새로운 스타 기업이 나올 리 없다. 이런 큰 물줄기를 되돌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도전을 택한 청년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실제 사례를 통해 증명하는 수밖에. 그러려면 벤처 생태계 육성과 규제 혁파, 자금 지원 등을 패키지로 엮어 한국 경제에 ‘새로운 피’가 돌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스타 기업을 배출하지 못하는 나라엔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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