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영어 절대평가의 배신, 그리고 '4세 고시 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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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영어 절대평가의 배신, 그리고 '4세 고시 금지법'

“오답 선택지를 정교하게 조정해 매력도를 높이고자 노력한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지난 13일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영역이 끝난 직후 EBS 현장 교사단이 내놓은 평가다. 이후 수능 영어는 각종 논란에 휩싸였다. 가장 많은 이의 신청이 제기된 영어 24번 문항 지문의 원저자는 한 수험생과 나눈 이메일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 않는 단어를 출제 문항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고 지적했다.

‘매력적인 오답’을 정교하게 설계한 결과는 3.11%라는 역대 최저 1등급 비율로 나타났다. 사교육을 줄이겠다면서 수능 영어영역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한 취지가 무색해진 셈이다.

오승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지난 4일 수능 채점 결과를 발표하며 “출제를 마치고 사교육 연관성을 보는데, 사설 모의고사 문제와 유사한 문항이 많이 발견돼 출제 과정에서 문제가 다수 교체됐다”고 밝혔다. 이어 “그 과정에서 난이도를 면밀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공식 사과했다.

사교육 연관성을 낮추려는 노력이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길 우려를 낳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대치동 입시학원 관계자는 “학군지에선 이미 중학교 때 수능 영어 수준으로 실력을 맞추기 때문에 영어는 입시 사교육 시장의 주요 과목은 아니다”며 “그런데 이번 수능을 계기로 영어 사교육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 마케팅’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전국에 체인을 두고 있는 P어학원은 “수능이 D-2913일 남은 초등부 학생들에게 올해 수능 영어 시험을 풀게 해보니, 고득점자가 적지 않았다”며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의 파장이 영유아 사교육 시장까지 번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일 대통령실이 수능 영어 난이도 조절 실패와 관련해 “조사해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9일 국회 교육위원회는 유아를 대상으로 영어학원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는 이른바 ‘4·7세고시 금지법’을 처리했다.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레벨 테스트 관행을 막겠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과열된 영어 교육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고민과 대책이 빠진 ‘땜질 처방’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학에 집중하기 위해 유치원생일 때 영어를 끝내놓는다는 ‘선(先)영어, 후(後)수학’ 로드맵이 통용되는 상황은 획일화된 입시 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공교육을 통해 원하는 수준의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불신도 한몫한다. 이번 수능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더 어릴 때부터 매력적인 오답을 걸러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시그널’이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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